[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상백마을에 바람난 아낙들이 다소곳이 구절초꽃으로 앉아 있다. 가을을 맞은 어머니들이 뒤늦게 피운 꽃바람이 흔흔하다. 70~80년간 묵정밭으로 방치된 불모지를 일구기 시작했다. 호미 발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모질어진 글 밭에 가, 나, 다, 라 글자의 씨를 뿌리고, 나무, 꽃들을 싹 틔우느라 전전긍긍했다.

처음에는 여남은 명이 호기롭게 대들었다가 몇몇은 중도 포기했다. 그중에는 코로나가 한몫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면을 못하게 하니 스스로 해 내기기 쉽지 않았던 게다. 몇 달 만에 규제가 풀려 얼굴을 보러 가니 들일에 발목을 잡혀 연필 잡을 여력이 없는 이들이 빠져나갔다. 그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열 일 제치고 나오는 이들이 있다. 뒤늦은 배움을 통해 가슴에 쌓였던 한이 풀리듯 글발을 풀어내는 열기가 뜨겁다.

성인 문해교실은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만 나오는 곳이 아니다.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이들도 더 공부하고 싶어 나온다. 이름도 못 쓰는 사람은 그에 맞게, 읽을 수는 있는데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수준에 맞는 공부가 이루어진다.

교과서를 읽고 쓰는 한편 활동지를 통해 그림에 색칠을 하면서 미적 감각을 익힌다. 꽃잎도 한 가지로 칠하던 것을 두 세 가지 색을 섞어 쓰면 더 생동감있게 표현된다는 것을 안다. 그림을 보고 떠 오르는 이미지를 글로 표현해 본다. 연륜이 녹아 있는 진리가, 철학이 배어 나온다.

경칩 날이다. 개구리와 올챙이 그림에 색칠하고 그림에 관련된 내용을 글로 표현해 보라 했더니 한 어르신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한마디 한다. "우수 경칩에는 대동강물이 풀리고, 님의 말씀에 내 마음이 풀린다"고 한다. 언제가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읊조린다. 시인이 따로 없다.

산토끼 똥을 먹고 살아났다는 어르신 이야기는 현대 의학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은 다 죽어, 부모님이 버린 자식이라 여긴 것을 외삼촌이 산토끼 똥을 구해와 그걸 먹고 살아났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상백은 오지 중의 오지다. 깊은 산으로 나물 뜯으러 갔다가 큰 짐승 만난 이야기가 구수하게 펼쳐진다. 그들이 살아온 삶이 한편의 전래동화 속 이야기다.

공부하고 싶었던 한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눈물겹다. 딸만 넷이 집안 맏딸로 태어나 작은집에 애보기로 들어갔단다. 학교를 보내 준다하여 갔더니 학교는 보내주지 않고 애만 실컷 보고 말았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쓰리다. 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자신은 동생 업어 키우느라 학교 문턱에도 못 갔단다. 애를 업고 공부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 어깨너머로 기웃기웃 쬐끔 깨우치다 말았다. 시집와서는 먹고살기 바빠 공부는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는 하소연이 한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부모님이 살아온 역사가 생생하다.

꼬부라진 허리로 엎드려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이 어느 날 책상을 사다 놓고 갔다며 "나이 80에 공부가 웬 말이냐. 늘그막에 별 효도를 다 받는다"고 한 구절 써서 내민다. 엽서 쓰기 글 공모에 제출했더니 입선이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가 남부끄럽게 무슨 상이냐며 불쌍해서 뽑아줬나 보다고 겸손해 한다. 공부해서 상 받아보기는 난생처음이라며 "아이구, 세상에!"를 연발한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그렇게 2년간 글밭에서 풀 뽑고 정성들여 가꾼 결실을 가슴에 안았다. "엄마의 가을, 꽃바람"이다. 평생 호미 들고 들일 하느라 꼬부라진 허리가 영락없는 호미다. 모습만 봐도 삶의 이력이 그대로 읽힌다. 이들이 모처럼 허리를 펴느라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선다. 엉거주춤 구부정한 모습이 한떨기 구절초다.

찬 이슬이고 서리꽃인양 / 산자락 따라 하얗게 피어난 / 함초롬한 이순의 꽃 / 무명저고리 내 어머니// 구절양장 마디마디 서린 어머니의 시린 삶이 / 선모초, 그윽한 향기로 오롯하다 / 찻잔에 어리는 구절초꽃/ 어머니의 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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