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버스를 타고 조지아 국경을 넘었다. 세계 최초 기독교 국가로 공인된 아르메니아이다. 바돌로매와 다대오 사도가 복음을 전해 사도교회가 세워진 나라다. 수도 예레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도나라 교수가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고불고불 구부러진 산길을 따라 아그파트 수도원을 향한다.

돌의 나라 아르메니아는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수차례 고난을 겪었다. 특히 터키와의 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 학살당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눈시울이 시큰해 졌다. 800만 명의 디아스포라가 미국, 러시아, 이란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조국의 향수를 달랜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민족의 아픔이 한민족의 수난과 오버랩 되면서 동병상련의 아픈 마음이 들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산림이 우거진 골을 따라 신선한 바람이 분다. "딜리잔 터널을 지나면 어떤 세상이 올까요?" 하고 도나라가 묻는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잠시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 출구를 나오는 순간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창했던 산림은 온데간데없고 민둥산과 넓은 초원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기후 환경과 식물상들이 너무도 차이가 났다. 화산활동으로 인한 토양과 기후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면 천국이 올까? 지옥이 올까? 상상해 보았다. 이생의 삶과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리에게 오리라는 기대감으로 여행의 감성에 푹 빠져 들었다.

세반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칼데라호에 가득 담긴 맑은 물은 에머랄드 색깔로 반짝인다. 강바람이 수면위로 파랑을 일으키며 부둣가로 밀려온다. 놀랍게도 바다 갈매기가 그곳에 와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다. 파란 물이 호수인지 바다인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날씨가 좋아 호수물이 파랗게 보이면 웃는다 하고 날씨가 흐려 검게 보이면 세반호수의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라고 생각 한단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색다른 생각과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과 문화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지하 감옥이 있는 코르비랍 수도원은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국가로 탄생케 한 성지이다. 성 그레고리가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 있어 믿음의 기적을 이룬 곳이다. 수직으로 뚫린 터널을 따라 지하 감옥을 내려가 보았다. 온통 암벽에 둘러싸여 있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침침한 곳이다. 아무리 소리쳐도 굴속에서만 울릴 뿐 밖에서는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굶어 죽으라고 넣은 감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존의 비밀은 어느 여인이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는 미담과 하나님이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성을 지켜오게 한 아라랏산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다. 노아의 방주가 떠내려가다가 멈춘 곳으로 영산이라 불린다. 아라랏산은 아르메니아 국기와 화폐에도 들어가고, 은행, 레스토랑 이름으로도 사용될 정도로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 산 정상은 만년설로 은백색을 띠고 있으며 구름에 자주 가리워 봉우리가 숨겨지기도 한다. 전쟁으로 인해 터키 땅에 자리하고 있어 멀리 바라만 봐야한다. 휴전선 철조망 앞에서 고향을 바라보고 애환과 슬픔을 달래는 남북 이산가족의 심정, 우리의 현실이 생각난다. 애잔한 마음이 나의 가슴에 한가득 채워진다. 고개를 연신 돌려 성지를 바라보고 뒤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동쪽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카스피해를 가로막고, 북쪽으로는 조지아가 흑해를 등지고 있어 해외 문물을 교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디아스포라는 조국을 사랑하여 언제든 나라를 다시 찾으리라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그들 속에는 선민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수난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이곳에 평강과 축복이 가득하고, 찬란한 내일이 밝아오길 빈다. 하늬바람이 옷자락을 스쳐가고, 머리위로 별빛이 쏟아진다. 예레반의 밤은 그렇게 또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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