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모처럼 화장품을 얻어왔다. 나는 화장을 하지 않고 아내는 아주 기초적인 것만 사용한다. 마침 스킨과 로션이 떨어졌던 아내는 세안 후 그것들을 사용했다. 새끼손가락 정도 되는 병 두 개, 겉면을 읽으려니 글씨가 너무 작아 어렵다. 간신히 읽어 낸 문구가 'ㅇㅇ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아내는 스킨과 로션일 거라고 했다. 조금 투명한 것과 하얀 것이 각각 들어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구분할 수 없지만 아내는 가능하다. 먼저 것을 바르며 "왠지 좀 끈적거리는 것 같다"고 했다. 좋은 거여서 그렇겠지. 나중 것을 바르던 아내는 이번에는 예전 것보다 따끔거리는 것 같단다. 모든 화장품이 어떻게 균일할 수 있을까?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

아내는 화장품 용기에 적힌 글씨를 자세히 읽어보라 하고 나는 그 작은 글씨에 핸드폰 사진기를 대고 확대해 보려고 애를 썼다. 또렷하게 '기능성 화장품'이란 구절을 읽어주고 확인시키려 해도 잔글씨라 어려운가 보다. 손전등으로 밝게 비추어 더 많은 사항을 읽었다.

하나는 '샴푸' 다른 하나는 '컨디셔너'라고 적혀 있다. 샴푸라면…?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알려 주었다. 아내는 잠깐 어이없어 하더니 세면실로 달려가 한참동안 얼굴을 닦으며 "계속 거품이 난다"고 했다. "샴푸로 얼굴을 닦았으니 보송보송 할 게고 그것도 두 번이나 세안을 한 셈이니 얼마나 깨끗이 한 거냐?"고 하니 황당해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다시 거울 앞에 앉으니 큰 병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스킨'과 '로션'이었다. 그다지 웃을 일 없는 아침시간에 한동안 마음껏 웃었다. 집에 온 두 딸들에게 "혹시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에 "알았다" 했더니 왜 그러느냐 되묻는다. 우스운 이야기를 해주려 했다 하니 궁금하단다. 내가 운도 떼기 전에 아내가 아침 일을 풀어놓는다. 아내는 언제나 설명과 그에 따르는 어조, 표정, 몸짓 언어가 무척 실감난다. 두 딸은 집안이 떠나갈 듯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쏟아낸다.

가족들이 실컷 웃었다. 악의가 없었고 자신이 한몫했다는 걸 아내도 안다. 화장품에 무지한 나를, 더구나 사온 것이 아니니 탓할 일도 아니다. 스스로 '스킨과 로션'을 구분하고 꼼꼼히 발랐으니 그런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생명에 위험이 없는 일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쁘게 사느라 실수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일들이 적지 않을 게다. 세월이 흐르면 실수들도 서로의 정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으로 남으리라. 일상의 굴곡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아닐까? 변화와 실수가 없다면 단조롭고 지루한 나날에 숨 막혀 어떻게 살아갈까.

적지 않은 세월을 소심한 성격 탓에 큰 풍파 없이 어렵지만 평탄한 삶을 이어왔다. 그래서일까 과거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의 근현대 화가 몇 사람을 기록한 글을 읽으니 고난과 역경 속에서 기억할 만한 작품들이 탄생했단다. 편안하면 게을러지기 쉬운 게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낮과 밤이 교차하고 사계절이 바뀌어 연륜이 쌓이듯, 찾아오는 고난과 함께 흐르는 게 삶인가 보다.

새옹지마란 말처럼 화와 복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니 쉽게 매듭짓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니 슬퍼할 일이 아니다. 뜻밖의 일이 난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고 세월이 흘러 희비의 감정이 흐릿해진 후에는 지난날을 돌아볼 추억의 자산으로 남을 게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비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들이 있어 뚜렷한 계절을 이루고 그 가운데 문화가 이뤄지니 삶에 적극적인 여러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니던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이 더 끈끈해져 가고 서로 하나임을 느끼고 확인하는 걸게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샴푸와 컨디셔너로 화장하던 어느 날을 추억하며 또 크게 웃을 날이 우리 부부에게도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다가 올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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