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두 사람이 시합을 한다. 결승전인가 보다. 꿈속에서도 승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평소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경기에서 결승전을 치른 이들과 어슷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는 것 같았다. 점심때가 되었는지 안면이 있는 분 가정에서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리고 아내는 젊다. 내 나이 사십대 중반을 넘지 않은 듯하다. 지인들 자녀들과 놀이에 빠져 우리 아이들이 먹는 곳으로 속히 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식사자리에서 다시 나온다. 자녀들과 아내가 함께 하지 않아 혼자 먹기가 민망해서다. 자리를 벗어나려니 주인집 아들이 잡는다. 얘기 끝에 전화를 하려는데 번호판이 흐릿하고 제대로 걸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면이 있는 막무가내 목회자가 시장 통 좁게 마련된 교회 터 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다. 그곳에 교회를 지을 모양인데 제반 준비는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조금 더 걸어오니 그곳도 교회부지 인듯한데 후배 목회자 혼자 설교를 하고 있다. 듣는 이들은 없고, 나는 사명 따라 전하니 들을 귀 있는 이는 들으라는 식이다.

그들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오래 살던 시장 통을 재개발하는지 길을 파헤치고 커다란 분무기로 연녹색 페인트를 뿌리고 있다. 페인트 입자가 날아다닌다. 복잡하고 통과하기 어려운 그 길을 지나가려고 나는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내 옷에도 분분히 페인트 가루가 묻어있다.

짧은 길을 다 통과하지 못하고 꿈을 깼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왜 연결성 없는 몇 장면이 보이는 것일까? 한동안 꿈에 나타나던 장면은 성도들이 모여 있고 예배시간이 되었는데 내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옷을 온전히 입고 있지 않든지 성경찬송가가 없든지 원하는 곳을 찾던 중에 기다리던 신자들이 흩어지던 장면들이었다. 그러면 내가 준비가 덜 된 것으로 해석하곤 했었다.

오늘 이 꿈은 단순히 개꿈인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내 삶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꿈속처럼 잡다해 삶의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일까. 마치 수북이 책들이 쌓여 있는 내 책상을 보는 것 같다. 나를 향한 책들의 눈이 사나울 게다. 읽어야지 마음은 있지만 독파가 안 되어 정리를 못하고 있다.

야물지 못해서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한다.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니 문제다. 방송대 책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성경과 설교에 필요한 책들이 흩어져 있다. 책갈피가 꽂힌 읽다만 책들, 다른 이들과 함께 읽기로 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고 지인들이 쓴 책들도 눈에 띈다.

점점 숫자를 더해가는 나이에 새로운 도전이라 포장된 욕심이 하나씩 늘어나 덕지덕지 붙어있다. 더하여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컴퓨터가 나를 한층 더 당황스럽게 만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면서 어질러 놓은 책상 꼴인 내 삶이 한편 당황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내 삶의 방식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새로 맞은 이 해에 할 일들을 생각하니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어차피 어질러진 참에 새로운 일을 하나 더 벌일까? 이미 마음이 가는대로 녹녹치 않은 일 한 가지를 추가해 놓았다. 동양철학을 배워보겠다고 가까운 학교에 온갖 용기를 끌어 모아 지원한 것이다. 제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욕심을 부린 것 아닌가 싶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련다.

세상과 시대는 비행기처럼 날아가는데 걷는 속도로나마 쉬지 않고 앞을 향해 가야지. 반면에 무얼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주제파악도 못하고 헤매는가 생각도 든다.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내 생각대로 살아보자고 자신에게 자주 다짐을 한다. 다른 이들에게 큰 피해 주는 일 아니니 내 판단대로 해서 안 될 일이 무어란 말인가?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남에게 조언을 듣지만 책임은 본인이 감당하는 것처럼 다른 이의 얘기를 조언이상으로 듣고 내 삶을 결정하거나 내 책임을 미룰 수야 없는 일이다. 어디선가 들은 구절처럼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게다. 삶이 꼭 꿈속처럼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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