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계절을 잃은 빗물이 추적추적 내린다. 삼한사온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지만, 요즈음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다. 무섭게 춥다가 폭설을 퍼붓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따사로운 봄볕을 보낸다. 깜빡 속아 꽃을 피웠다가 기겁하고 사그라진 꽃망울이 애잔하다. 오늘은 가을비 오듯 한다.

지인의 시부상 문자가 뜬다. 맏며느리로 오랫동안 시부모를 모셔 온 무던한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문할 수 있는 날이 하루뿐이라 몇몇이 서둘러 조문을 갔다. 빈소 옆 작은 방에는 93세 되신, 망백(望百)을 넘긴 시어머니가 담담히 자리하고 있다.

고인은 올해로 100세가 되셨다고 한다. 연세가 높은 것은 알았지만 100세까지 된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백 세, 그 말을 듣고 한편에서 백수하셨네. 천수를 다하셨네. 한마디씩 한다. 엄격히 말하면 백수(白壽)는 99세를 말함이고, 천수(天壽)는 120세를 이른다. 100세를 상수(上壽)라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 수명이 120세까지라는 말이 요즈음 나온 게 아닌 거다.

나이를 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 의미 깊고 재미있다. 할머니를 '할망구'라 하는 말을 흔히 들어 왔다. 그저 할머니를 장난스레 얕잡아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망구(望九)란 90을 바라보는 나이, 즉 81세를 뜻한다. 90을 모질(耄耋)이라고도 한다. 모(耄)자는 한자로 노(老)자 밑에 모(毛)를 썼다. 털까지도 늙는다는 기막힌 뜻이 담겨 있다.

주변에는 할머니 같지 않게 젊고 세련된 할망구가 많다. 염색하고 화장하고 나서면 10년 이상은 젊어 보인다. 나이가 들어도 자기 관리가 확실하고 수명이 길어졌다는 걸 느낀다. 세월도 그냥 흐르는 대로 맡겨둘 일이 아닌 거다. 자신에게 맞는 배움을 찾기도 하고, 운동은 기본이다. 취미 생활도 다채롭게 하고 있다. 100세 세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20여 년 전만 해도 80세를 넘겨 돌아가시면 호상이라 했다. 내 어머니는 80에 이승을 떠나셨다. 당시 누군가 호상이라 했다. 너무 애통해하지 말라는 위로였겠지만, 내 어머니이고 보니 아깝고 아까웠다.

고인이 아무리 연세가 높아도 호상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호상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별다른 병치레 없이 복을 누리며 오래 산 사람을 말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부모를 잃은 슬픔은 차치하더라도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장례식장 풍경도, 장묘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상주와 슬픔을 같이 하며 밤을 새워주는 풍습이 사라졌다. 상주가 쉬도록 가급적 밤 10시 넘어 조문 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예의다. 매장보다 화장하는 것이 일반화 된 듯싶다. 산소를 쓸 자리도, 관리도 어려운 실정이다. 벌초도 어려운 숙제다. 이승을 잠시 빌려 쓰고 떠나간 후에는 흔적도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이치다. 조상을 생각하는 정신은 이어가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장묘문화는 현실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대대로 우리는 무덤을 중시해 왔다. 사후 묻히는 곳뿐만 아니라, 산모와 태아를 연결했던 태 역시 중시하여 왕가에서는 태 무덤까지 만들었다. 진천에는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 무덤 일 게다. 탄생지 뒤, 해발 450미터 높이의 태령산에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이 또한 세월 저쪽의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태어남이 중요하듯 죽음 역시 중요하고 경건한 의식이다. 고인돌의 역사를 거쳐 매장을 통해 현재 자연장으로, 그 무덤의 형태는 변천되어 가지만, 인간 존중, 사람살이의 정신은 변할 수 없다. 이승에서 100년을 살고 간 사람과 그 가족들을 보면서, 흐르는 시간 속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인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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