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효진 수필가
놀이터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아이들이 귀한 요즘이라 반가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방학을 맞은 자녀가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걸 보면서 모임하는 엄마들이 애들을 데리고 나왔단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서 놀다보니 자연스럽게 얘기도 많이 하게 되고 쌓인 스트레스도 다 풀린다며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어릴 적, 우린 아침만 먹으면 얼어붙은 황톳길을 돌아 길숙이네 마당으로 나갔다.
그곳은 맨발로 놀아도 발에 흙이 묻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널찍해서 온 동네 애들이 눈만 뜨면 모여들곤 했다.
처마 밑 고드름이 아침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길숙이네 봉당에는 지게를 진 남정네들이 칡뿌리를 캐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부지런한 애들은 벌써 나와서 같이 놀 사람을 기다리며 자치기 막대기를 다듬고 있었다.
방학을 해도 갈 곳이 없으니 큰애부터 꼬맹이까지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패를 나누어서 한쪽에선 구슬치기나 고무줄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치기를 시작했다.
"해여?"
"해여"
긴장감이 감돌고 제일 덩치 큰 애가 긴 막대기로 방아깨비를 탁 쳐서 저만치 전봇대까지 날려 보내면 상대방은 그걸 잡으려고 뛰어다니고, 한자 두자 막대기로 재어가며 나가다 보면 이긴 편에선 동네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질러댔다.
그렇게 노는 재미에 폭 빠져 배고픈 줄도 모르고 놀다 보면, 너무 세게 던진 방아깨비가 길숙이네 마당 옆 오줌독에 빠지면서 자치기는 끝이 나곤 했다.
난 알록달록 예쁜 구슬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는 애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해서 그런 걸 살 돈이 없으니 열심히 연습을 해서 구슬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앞집에는 미강이가 살았다.
그 애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다녔는데 그 날은 유난히 아기 우는 소리가 나고 시끄러웠다. 지나가다 보니 마당에는 밥상이 나뒹굴고 그 애 엄마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울고 있었다.
그 날도 미강이는 혼자서 자치기를 하고 있었다.
난 그 애가 불쌍했지만 나보다도 세 살이나 더 나이가 많아서 이름을 부르기엔 뭔가 좀 불편하고 그렇다고 오빠라고 하긴 싫어서 그냥 호칭 없이 지냈다.
"나하고 놀래?" 내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미강이 하고 깨진 구슬을 꺼내서 굴려 먹기를 하는데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잘 되어서 내가 구슬을 전부 땄다.
구슬을 호주머니에 넣고 신이 나서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집으로 뛰어가는데 그 애가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 삼춘이 전번에 와서 사 준 게 또 한 개 있는데 한 판 더 할겨?"
미강이는 잠바 안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보여주었다.
너무 이뻤다. 흠집은커녕 흙 하나가 안 묻고 반짝거리는 유리 속에서는 빨강 파랑 노랑 색깔이 빛나고 있었다.
"좋어, 내가 따도 전번처럼 울지마, 물려주는 거 일(1)도 없다"
단단히 약속을 받아내고는 숨을 멈춘 채 온 정성을 다해 구슬을 굴렸다. 성공이었다.
난 처음으로 가져보는 너무나 이쁘고 깨끗한 그 구슬을 소중하게 들여다보며 빨리 가서 동생들한테 보여주려고 돌아섰다.
그런데 미강이가 소리도 없이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리더니 때 묻은 소매 끝으로 누런 코를 쓱 문질렀다.
그 순간, 때가 껴서 새까맣게 터진 미강이의 손등에, 쩍쩍 갈라진 그 손등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추운 날씨에 장갑도 안 끼고 매일 흙장난을 하고 다니니, 거기다 두레박 샘도 없어서 씻을 물도 마땅치 않으니 손이 터지고 피가 나는가 보다.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니가 다시 가져가. 니가 애끼느라구 감춰둔 거잖어."
코만 훌쩍거리며 서 있는 미강이의 호주머니에 나는 보석 같은 그 구슬을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저녁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굴뚝을 지나 신나게 집으로 갔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미강이와 길숙이네 마당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진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부디 그들에게 축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