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나 되었을까. 시장통에 살던 나는 장날엔 툭하면 조퇴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집에 가보라고 일러주신다. 이미 엄마와 모종의 내통이 있던 터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두 살배기 막냇동생을 내게 업힌 다음 얄파닥한 포대기로 단단히 묶어주었다. "애기 잘 봐야 한다!" 힘주어 말하는 엄마는 장터 초입에서 문구와 잡화를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시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때쯤 되면 학교를 파한 친구들이 하나둘 차부 앞 양지바른 마당에 모인다. 나도 슬그머니 다가가 애기 엉덩이를 출썩거리며 고무줄 놀이, 사방치기하는 친구들을 바라보곤 했다. 시장통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전파사 딸, 약방집 아들, 실비집 딸, 정육점 아들, 빵집 아들이 있다. 맨 끝에 신발가게 아들도 있다. 그 신발가게 아들인 민규가 요즘 고향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로한 부모님을 보살피느라 당분간 머물 거라고 한다.

민규는 그 옛날 이곳 칠성면 촌에서 공부를 꽤나 잘했다. 청주로 진출해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은 서울로 갔다. 공교롭게도 서울의 봄을 맞이한 80학번이다. 그 봄이 광주의 암흑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순간에 친구는 거대한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다. 최루탄으로 상징되는 학생시위 현장에서 매운 눈물, 슬픈 눈물을 흘렸던 친구다.

1980년을 투철한 애국심으로 보낸 사람이 또 있다. 내 큰오빠다. 우리 엄마가 애지중지한 오빠는 서울에서 경찰 생활을 했다. 하루가 멀다고 학생시위가 열리는 시기에 하필이면 민규가 다니는 대학교에 파견되었다. 교내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관리하고 시위를 진압하는 책임자로 근무했다. 오빠의 애국심은 민규 못지않게 대단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고 여긴 오빠는 시위진압에 진심이었다.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학교 내 온갖 정보를 꿰고 있던 오빠는 고향 후배인 민규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서로의 갈 길이 극과 극이었다. 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같은데, 한 사람은 시위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진압에 열중했다. 그들이 목숨 걸고 나라를 사랑할 때 나는 개인적인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TV 뉴스에 비치는 시위 장면을 가끔 보았을 뿐이다. 며칠 전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다. 두 시간 동안 먹먹한 상태로 간신히 버텼다. 영화는 1979년 12월에 있었던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 상황을 긴박하게 그려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빠와 민규가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 애국자 큰오빠는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정착했다. 직접 옥수수 농사도 지으면서 농촌 생활에 잘 적응했다. 평온한 오빠의 얼굴을 볼 때면 언제 그런 격정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짐작되지 않는다. 이제 내 친구는 60대 중반을 바라보고 오빠는 팔순에 다다랐다. 그들이 애타게 갈구하던 조국의 번영과 안정은 지금 구현되었을까.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버스를 타고 모래재를 꼬불꼬불 돌아갔었다. 고개 아래 층층 다랑이논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던 가을을 기억한다. 지금은 직선으로 오르다 그냥 직선으로 내려간다. 멋없다. 고향 가는 옛길은 꿈결에나 볼 수 있을까. 버스 창문 너머로 보았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선하다. 괴강 건너 칠성으로 접어들면 멀리 군자산이 보인다. 오빠가 사는 송동리를 지나 민규가 사는 도정리에 다다른다.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예전에 고향 갈 때는 드라이브 삼아 다녔다. 민규가 내려온 뒤로는 생각이 많아진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친구의 삶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으리라. 지금, 내 고향 칠성엔 두 애국자가 살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나는 그들에게 괜히 미안하고 고맙다. 두 사람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송동리 앞 냇물을 건너며 그들의 애국심을 떠올린다. 이제라도 나는 어떻게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가 생각에 잠긴다. 지금 사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찾아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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