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을 그리며 사라져가는 옛것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우수가 지나고 봄기운이 스멀스멀 흙살을 일으켜 세운다. 뒹굴거리던 정신이 반짝 고개를 든다. 자동차 시동을 켜고 고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백곡면 소재지가 위치한 석현리(石峴理)다. 돌고개라 부르던 곳이다.

800여 년 바위와 한 몸으로 얽혀 살아가는 나무를 찾았다. 지새울 느티나무다. 2천년 2월 14일 보호수 진천 5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야트막한 바위 동산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이어가느라 얼마나 힘겨웠는지 툭툭 불거진 뿌리가 바윗돌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뭉클 가슴을 저민다. 인생 백 년도 안 되는 삶의 여정에도 우여곡절로 수많은 상흔과 옹이를 품고 아파하는데 800여 년 살아오고 있는 노거수의 삶은 어떠했을까. 부질없이 헤아려 본다.

맨 처음 씨앗을 내린 곳이 왜 하필 바위산이었을까. 암만 봐도 생명체가 살아갈 만한 터는 아니다. 그래도 어려운 여건을 수용하며 굳건히 살아가는 현장을 마주하니 마음이 경건해진다. 척박한 바위 틈바구니에 연약한 뿌리를 내리느라 혼신을 다한 열정이 굳건한 바위를 쪼갰다. 바위는 나무의 삶에 분명 장애가 되는 요건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바위를 밀어내지 않았다. 외려 밀려나는 바위를 뿌리로 움켜잡고 보듬었다. 품 넓은 마음이 그 오랜 세월 버티고 살아온 힘인지도 모른다. 뿌리를 내리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하여 쪼개진 바윗돌을 모두 밀어내었다면 오늘날 그 자신, 오롯이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노거수 느티나무 앞에 설 때마다 우리네 부모님이 살아온 흔적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겉으로 울근불근 드러난 뿌리는 거무튀튀한 아버지의 팔뚝에 불거졌던 힘줄이다. 버거운 가장의 힘을 느낀다. 나에게 이롭지 않다고 하여 배척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읽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묵묵히 삶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지새울 느티나무 아래에는 마을 자랑비와 이 동네로 입향하여 강릉 김씨 세거지로 만든 김사혁의 유허비, 그리고 그 후손의 선행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지새울'은 세상의 일을 아는 사람, 즉 지사(知事)가 사는 마을이란 의미로, 지사울로 부르기 시작하다가 발음상 지새울 굳어진 자연마을 이름이다. 내가 태어난 바로 옆 동네이다. 지금은 지곡(知谷)이란 행정명으로 일반화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듣고 부르던 지새울이란 이름이 정겨워 나는 지금도 그리 부른다.

세상의 이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 누구였을까. 바로 충절공 김사혁이다. 그는 1345년 음서로 대관서승이 되어 관에 나갔다가 동북면행영절제부사 시절 홍건적을 물리쳤다. 그 후 전라도 원수와 양광도병마사도원수로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운 사람이다. 관직을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후학을 가르치며 탁월한 예지력으로 마을을 잘 살게 하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수호신이 된 느티나무에 고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받들고 있다.

김사혁의 손자 김덕숭은 세종 시대 큰 효자로 꼽혀 삼강행실도에 그 효행이 기록되었고, 그의 효행을 기린 어제시(御製詩)가 전해지고 있다. 진천의 역사 인물로 귀감이 되기에 종박물관 뒤편에 '백원정'이란 정자를 세워 '효는 백행의 근원'임을 일깨우고 있다. 한편, 진천군에서는 김덕숭을 비롯한 이여, 이종혁, 이부 등 4인의 학자를 배향하였던 '백원서원'을 복원 중에 있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이렇듯 우리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사라져가는 풍습, 잊혀가는 전통문화 속에 녹아 있는 정신을 살려내려 노력하고 있다. 살아 있는 우리의 정신문화의 맥을 잇고자 함이다. 이제 곧 지새울 느티나무에도 새순이 활짝 돋아 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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