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주택에 살고 있어 종종 골목길을 쓸곤 한다.

눈이라도 내리면 모두 돌아가면서 눈을 쓸고 있다. 딱히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냥 시간이 되는 사람이 쓴다. 나는 늦게 자는 편이다.

그래서 자기 전에 눈이 내리면 먼저 나가 쓸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 또 눈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골목에는 우리 집까지 네 집이 있다. 그중 우리 집이 첫 집이다. 골목 초입에는 작은 계단이 있다. 그 옆으로는 오르막인데 오래되어 들쑥날쑥하다. 잘 밟지 않는 곳도 있는데 풀들이 모여 있다.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냉이와 민들레,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이 낮은 키로 서 있다.

작년 12월이었다. 그때는 별로 춥지 않았는지 아주 작은 냉이가 있었다. 땅에 다닥다닥 착 달라붙었다. 곧 눈이 오면 몽땅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냉이 세 뿌리를 캤다. 손으로 쑥 잡아당기니 뿌리 채 뽑혔다. 마침 노란색 빈 화분이 있어 그곳에 모두 심었다. 창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냉이 화분을 놓았다. 물도 잘 주었다.

따듯한 실내에 들어온 냉이가 곧 꽃을 피울 것만 같았다. 날마다 얼마큼 자랐나, 눈맞춤을 했다. 하지만 작은 냉이의 키는 꿈쩍도 안했다. 얼마 후 땅바닥에 딱 붙은 잎사귀들이 위쪽으로 향했을 뿐. 깜깜무소식이었다. 혹시 추위를 이겨야만 꽃을 피우는 것일까? 궁금증까지 생겼다.

화분에 정성을 다 할 무렵 내 마음이 통했는지 냉이가 더 씽씽해졌다. 잎사귀도 더 짙은 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냉이꽃 소식은 없었다.

"너희들 이렇게 꽃 안 피웠다간 몽땅 라면 끓일 때 넣을 줄 알아."

나의 정성을 알아주지 않는 냉이에게 겁박(?)을 했다. 행여나 그러면 "알겠사옵니다."라며 곧 하얀 냉이꽃을 피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님 눈치가 없어 정말 뜨거운 라면 국물에 풍덩 빠지던지.

보통 냉이하면 냉이된장국을 떠올릴 테지만 난 라면부터 떠오른다. 언젠가 집에 냉이가 많았다. 너무 많다 보니 언제 다 먹나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라면을 끓일 때 냉이를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보통 파를 숭숭 썰어 넣었는데 냉이도 특별했다. 그래서 나는 '봄날의 라면'이라고 이름을 붙여 봄이 오면 꼭 냉이라면을 먹곤 한다.

(참고로 여름에는 '상추라면'이라고 이름을 붙여먹는다. 상추를 라면국물에 넣는 것이 아니라 잘 끓인 라면 면발을 건져 상추쌈을 싸 먹는 것이다. 고소하고 정말 특별한 맛이다.)

냉이를 넣은 라면은 모양부터 색다른 느낌을 준다. 냉이는 단백질이 많고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다. 무엇보다 쌉쌀한 맛과 향이 좋아 자주 찾게 된다. 그동안 먹었던 라면과는 수준 높은 맛을 선물해 준다.

'봄날의 라면'을 먹을 때에는 냄비뚜껑을 뒤집어 후후~ 불며 먹지 않는다. 나름 최대한 우아하게 먹으려고 한다. 물도 와인 잔에다 먹으면 더 근사하다. 식탁에 노란 프리지아가 가득한 꽂병이 놓인다면 봄날 최고의 라면 맛을 볼 수 있다.

아! 냉이 화분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1월 말쯤 아주 작은 꽃을 내밀었다. 한겨울에 고개 내민 하얀 꽃이 신기해 휴대폰으로 찍어 확대해서 보았다.

꽃 아래에 다닥다닥 붙은 것을 자세히 보니 연두색 하트 모양이다. 처음 알았다. 신기했다.

나는 다른 꽃보다도 냉이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냉이꽃을 동요나 동화 쓸 때 넣곤 한다. 냉이꽃은 가까이 봐도 예쁘고 멀리서 봐도 참 예쁘다. 그냥 꾸미지 않은 편안하고 수수한 모습이 좋다.

그동안 냉이꽃을 보았지만 작년 호암지에서 길게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보면 정말 하얀 눈밭 같았다. 휴대폰으로 냉이꽃을 엄청 찍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가까이 대고 찍어도, 멀리 찍어도, 한 송이만 클로즈업해서 찍어도 다 매력적이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한참 보고 있으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꽃집의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느낌이 좋다.

봄이 점점 제 색을 드러내고 있다. 화분의 냉이는 요즘도 여러 갈래로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하지만 곧 꽃이 질 것만 같다. 그래도 한겨울에 처음 본 하얀 냉이꽃은 내 가슴에 오래 오래 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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