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파아란 수평선 너머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밀려오는 파도는 하얀 거품을 모래밭에 토한다. 맑은 햇살이 해변위로 쏟아진다. 해풍의 공기가 코끝에 후끈하다. 원숭이 가족들은 먹이를 찾느라 야자수 위로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새끼 원숭이가 어미 배의 앞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려 함께 걷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우리가 깔아놓은 돗자리 주변에는 바다 새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맴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날씨가 정말 이국적이다. 

태국 송쿨라시 핫야이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손주들의 영상통화음이 울린다. 핸드폰 화면속에는 두터운 겨울옷을 입은 손주들의 얼굴이 보이며 귀여운 목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여기는 추워요. 그곳은 어때요?" 아내가 "여긴 따뜻해"하고 바닷가를 물들인 노을 풍경을 바로 보여준다.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고는 "오 마이 갓!" 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한 곳은 무더위로 땀을 흘리고, 또 다른 곳은 영하의 추위로 떨고 있는 별천지 세계를 동시에 맛본다. 

한 달 살기 생필품을 사기 위해 대형 백화점에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차 트렁크를 열어 확인하고, 신분증을 보여주자 주차권을 건네준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순간, 신발 바닥이 뭉그러져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고무가 삭아서 검은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직원이 ㅤ쫒아 와서 검게 묻어난 발자국을 카메라로 찍는다. 너무 황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몸의 균형을 맞추고  척추 신경자극에 좋다하여 아내가 꽤 비싸게 사 준 신발이다. 평소 신발장에 모셔 두었다가 이번 해외 여행길에 꺼내 신었는데 이지경이 되었다. 결국 맨발로 매장의 신발코너를 찾아 새 신발을 사 신어야 했다. 아끼다 똥 된 꼴이다. 

직장으로 전자제품 판매원이 사무실에 왔을 때다. 사진기를 서로 먼저 사려고 다툰 적이 있었다. 카메라의 기능이 들어있는 핸드폰이 나온 후로 욕심냈던 그 사진기는 서랍 구석에서 잠자고 있다. 나의 욕망으로 가진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에 몸이 움츠려든다. 젊은 시절 힘들고 어려울 때, 부지런히 돈을 벌고 나중에 여행도 하며 맛있는 음식도 사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은퇴라는 인생여정의 선물을 받고 보니 튼튼했던 이는 시큰거리고, 조금만   걸어도 무릎은 찌릿한 통증을 느낀다. 뜨거운 여름날도 밀려오는 어둠을 이길 수 없듯이 나 또한 가는 세월과 청춘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과 시간을 누려야겠다. 

귀한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준비한 비싼 그릇, 노후에 편안하게 쓰려고 모아둔 돈, 귀한 모임에 가려고 간직한 값비싼 것들을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남겨 놓은 것들 중, 써보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짐으로 남게 하지는 말아야 겠다. 내가 많이 소유하면 누군가는 적게 가져야 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의 노래, 아픔의 절규, 고통의 탄식을 듣는 귀를 열어두고 싶다. 서녘 하늘에 걸린 해가 고단한 하루를 접는다. 날개 짓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쁘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세월의 무게를 등에 지고 걸어온 삶의 허리가 무겁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존재가 다르듯이 눈을 뜨고 보는 세상과 눈을 감고 보는 세상은 역력하게   다르다. 눈을 뜨면 욕망과 함께 가시광선을 타고 비쳐오는  만 가지 색깔이  들어온다. 눈을 감으면, 지나온 인생의 발자욱과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 꿈속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을 쌓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핫야이 해변에  쏟아지는 별들로 가슴을 덮고, 바다를 베게삼아 길게 누워 파도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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