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그림자가 어느새 길어졌다. 산책길의 나무그림자를 따라가며 그림자밟기 놀이하던 시절이 그리워 폴짝폴짝 따라 밟으며 집으로 왔다. 아뿔싸. 장갑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찬 것 같아 끼고 나갔더니 그림자와 친구가 되었나 보다. 오던 길을 되돌아 가 보았다. 누군가 길가 나무 위에 장갑 한 짝을 걸어 놓아 반갑게 다가갔으나 잃은 게 아니다. 스카프에 이어 장갑마저 분실했으니, 마음이 조금 찜찜하다.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하는 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행복이란 시구를 암송하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어릴 때 엄마는 빨간 벙어리장갑을 떠서 끈으로 이어주셨는데 큰 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끈이 옹이에 걸렸다. 장갑을 벗어놓고 가는 수밖에 없는데 옆집 오빠가 내려 주었다. 그때 그가 참 멋있게 보여서 한동안 가슴 떨리던 추억이 있다. 어린 시절의 분홍빛 사연을 소환해 미소를 짓는데, 식탁에 다가서던 남편이 장갑 한 짝을 마술사처럼 내민다. 의자에 떨어진 것이 식탁보에 가려서 보이지 않은 게다. 잃어버린 사람 죄가 더 많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세상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난번 원로분이 유서 깊은 문학지에 주인공으로 실려서 축하 차 일행과 점심을 같이 했는데 오시다가 장갑을 분실하셨단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바로 하나를 사드려야지 했는데 기호도 모르고 바쁘다는 핑계로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내 장갑을 잃었다가 찾고 보니 좋아서 그런 마음을 선물하고 싶었다. 바로 신청하고 달력을 보니 입춘이 가깝다. 사후 약방문을 한 것 같고 계절 감각을 모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이래서 시절 인연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며, 나쁜 일은 즉시 잃어버리는 힘인 둔감력이 꽤 있었는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며칠 후 괜한 기우가 사라졌다. 얼마 전에도 택시에서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택시 기사가 가지고 왔더란다. 감동했는데 지금도 그런 마음이라며 괜한 소리를 한 게 부끄럽고 주책스러워 펜을 들었다고 하셨다. 잃어버린 장갑은 이천 원짜리여서 쑥스럽다고 하시는 말씀에 다시 민망함이 교차했다. 적지 않은 연세에도 늘 배우고 가르치시며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물질은 최소화해, 거주하는 집을 사후 모교에 기증하기로 한 분이시다. 어려서 읽은 큰 바위 얼굴이 떠올랐다.

인간의 가치는 명예나 권력 등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탐구를 거쳐 얻어진 지식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서다. 중국 명나라 양명학의 사상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에도 주제가 되었다. 진리는 시대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로 통한다는 이치이리라.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니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라고 법정 스님은 소욕지족(少欲知足)을 말씀하셨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평범한 사람들이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장갑이나 책 한 권 버리려 해도 망설이니 말이다. 미련을 버려야 하지만 세월이 쌓이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도 고정관념은 더께같이 쌓인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문 한쪽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게 세상 이치라고 한다. 다만 우리가 닫힌 문에 집착해서 아쉬워하기 때문에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어려서 읽은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미화된 책 속의 위인은 존경하면서, 본보기가 되시는 분은 곁에 계셔선지 그러하지 못하다. 큰 바위 얼굴을 닮고 싶어 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옹색하게 생각할 뿐이다. 현수막이나 신문, TV에 나 좀 뽑아달라는 인물이 가득한 선거의 계절이다. 진정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이타적 리더는 누구인지. 국회에 입성하면 너나없이 당리당략만 좇아서 국개란 비속어까지 쓰는 세태다. 나라 발전을 위한 초심으로 선한 영향력을 저녁나절 그림자처럼 길게 행사할 큰 바위 얼굴은.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하더니 분실한 장갑이 저녁나절의 그림자가 되어 사유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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