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우 / 충북도교육위원
재작년 이맘때, 인터넷은 온통 '서울역 목도리녀' 이야기로 넘쳤었다. 서울역 부근에서 한 여대생이 노숙자에게 먹을 것과 목도리를 건네는 장면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혀, 누리망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전했던 이야기.

그 얘기를 접하고 나는 그녀가 혹 예전에 내가 보았던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젖기도 했었다. 20여년 전 내가 직접 겪었던 일과 너무도 흡사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어느해 성탄전야였다. 나는 청주시내 성안길에 볼일이 있어 북문로에서 지하상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예사롭지 않은 광경 앞에 흠칫하고 말았다. 뇌성마비 장애가 심한 걸인 하나가 어떤 가게 앞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발이 얼어붙은 채 아무런 도움 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기겁을 했다. 뒤쪽에서 덜미를 채듯이 들려온, 찢어질 듯한 여자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모피코트 차림의 한 아가씨가 엎어질 듯 고꾸라질 듯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코트 안에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듯, 강아지 비명도 함께 자지러져서 행인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 "아따, 원! 사람을 보고 저리도 질겁이람? 강아지 놀랄깨비 저런댜?"

아가씨의 비명도 거지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흉한 사람'을 보고 '귀한' 강아지가 놀랄까 봐 설마 저럴까…하면서도 못내 씁쓸함을 씹고 있는데, 이번엔 또 다른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머머 어떡해, 어떡해…" 동동거리는 탄식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까만 학생코트 차림의 단발머리 소녀가 거지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니, 얘는 또 뭔 주책이랴? 얘! 예배시간…" 하고 재촉하는 목소리는 좀 전의 그 아주머니였다. 모녀지간인 듯한 그녀들은 성탄 예배를 가던 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자리를 떴다. 서둘러 성안길로 향했지만 지하상가 계단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점점 걸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좀 전 그 자리 상황이 다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해서, 달음박질하듯 반대편 계단을 올라 아까 그곳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단발머리 소녀가 자신이 끼고 있던 벙어리장갑을 거지의 목에 걸어주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돈이라도 주려는 듯 핸드백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얄팍한 호기심밖에 가져보지 못했던 나는, 부끄러움 너머로 무언가 뭉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아있는 천사를 목격한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그 후, 그 장면은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선연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문득문득 주변을 다시 살피게도 된다. 지금 우리 주변에 어쩌면,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한 천사가 내려와 은총을 전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즈음 온 누리에 움트는 '사랑의 눈'들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운 저 봄 햇살처럼 말이다. 김병우 / 충북도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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