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원용진 서강대 교수

'한 지붕 세 가족', '파랑새는 없다', '서울의 달', '전원일기'… 동네를 기반으로 한 인기 TV 드라마였다. 지금은 TV 어디도 동네는 없다. 계약관계로 맺어진 회사, 우연히 만난 연인의 연애 공간이 동네를 대신해 이야기를 엮어간다. 문학에서도 더 이상 동네를 주요 이야기감으로 다루지 않는다. 가끔 등장하는 동네 이야기도 시계바늘을 뒤로 돌린 과거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네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현실에서 동네는 함께 존재하던 모든 것과 동시에 사라져가고 있다. 동네 친구, 동네 어른, 동네 형, 동네 가게는 우리 입에 오르내리지 못하는 희귀언어가 되고 있다.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나 홀로 보울링>의 저자 로버트 퍼트남은 미국의 가장 보편적인 동네 놀이인 보울링장이 줄거나 혼자 즐기는 사람이 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보울링장의 변화는 보울링장에서 나누던 동네의 현재, 미래, 걱정거리의 토론 실종으로 이어진다. 그 변화는 동네가 사라지고, 동네를 걱정하는 이야기 공간이 줄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고 있다.

뉴타운 건설이 주요 선거 공약이 되고 결과가 그에 흔들리는 것도 동네의 약화에서 비롯된 결과다. 동네가 있거나 말거나 땅값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동네의 절실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헛공약의 정치인이 정치계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되는 것도 동네의 몰락에 힘입은 바가 크다. 땅값이 올라 무주택자가 늘고, 전세 가구의 54%가 2년마다 이사를 하면서 동네 형성이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눈감는 것도 동네 몰락과 무관하지 않다.

동네에 대한 관심이 낮고, 그럼으로써 동네가 사라지면서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의 호혜성도 현저히 떨어졌다. 기업형 수퍼(SSM)와 동네 구멍가게 간 갈등이 그 구체적 예다. 이미 익명에 빠진 동네 사람들은 동네 구멍가게의 고통을 같이 나누지 못한다. 언제든 싸고 편리한 곳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업형 수퍼와의 경쟁에서 구멍가게는 이름 그대로 무장해제되어 있는 셈이다. 인정으로, 이웃 간 정리로 이용해주던 과거 경험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은 한 연설에서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동네가 다 소요된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선 학교 뿐만 아니라 동네의 약사, 복덕방 주인, 구멍가게 아줌마, 식당 아저씨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켜보는 눈, 관심의 손길이 인간을 제대로 성장케 해줄 거라며 동네의 중요성을 설파한 연설이었다. 동네가 훌륭한 교육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규범적 이야기지만 우리가 감당해낼 이야기는 아니다. 클린턴의 이야기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우리는 동네 이야기를 꺼낼 만한 사정이 못된다. 동네가 쪼그라들면서 동네는 부정적 의미를 담는 형용어로만 존재한다. 못하는 축구는 동네 축구고, 촌스런 유행은 동네 패션이며, 재미없는 방송은 동네 방송. 이런 식이다. 동네를 아예 관 속에 넣고 대못을 박아 다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태세다. 동네란 말 속에서 공동체를 떠올릴 단서는 점차 더 사라져간다. 동네란 말 안의 공동체 향내는 말라져만 간다. 여기저기 정치 계절이 돌아왔다는 징후는 뚜렷하다. 하지만 아직 동네에까지 이르렀다는 표징은 어디에도 없다. 늘 큰 정치만 이야기하는 우리의 정치 행태 때문이리라. 동네를 이야기하는 일은 잘 못된 정치, 경제, 교육 정책을 따지는 중요 시작점이다. 생활세계를 점검하는 중요 지점이다. 너무 멀리 고개를 들어 큰 정치를 이야기하는 노고를 멈추고 나의 생활기반인 동네를 이야기하는 동네 정치를 펴는 일은 늦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급과제다. 등록금 반값 투쟁의 주인공인 대학생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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