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손정미 충북도 기업유치지원과·영문학 박사

죽은 시인의 사회, 미세스 다웃파이어, 굿윌 헌팅 등 주옥같은 영화를 남기고 올여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암스의 영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이라는 그리 유명하진 않은 영화다. '바이센테니얼'은 '200년의' 또는 '200년 마다'라는 의미로 영화 제목은 '200년을 사는 남자'로 해석될 수 있다. 인터스텔라란 영화에서도 시간의 상대적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과 달리 로봇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온전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영화는 어느 날 자상한 가장 리처드가 가족을 위해 가전제품 하나를 들여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청소, 요리, 정원손질 등 모든 집안일을 해결하는 첨단 가전제품. 아이들도 돌봐주는 이 가전제품은 다름아닌 가사로봇이다.

로봇 앤드류(NDR-114의 애칭)는 리처드 가족을 극진히 모시며 소임을 다하고, 특히 둘째 딸인 일곱 살의 작은 아가씨의 듬직한 동무가 되어준다.

그러나 앤드류는 불량품 로봇이다. 조립과정 중 사소한 실수가 있었는데, 그를 만들던 기술자가 샌드위치를 먹다가 마요네즈 한 방울을 로봇의 복잡한 회로 위에 떨어뜨린 것이다.

이로 인해 로봇의 신경계에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고, 바로 로봇에게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지능과 호기심'을 지니게 된 것이다. 로봇 제조회사에서는 불량품 앤드류를 회수 분해하기 위해 리처드에게 반환을 요구하지만 오히려 그는 앤드류를 보호하고 그가 만드는 목공예품을 팔아 모은 돈을 앤드류 이름의 계좌를 열어 적립해준다.

어느 날 앤드류는 적립금 모두를 리처드에게 줄테니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리처드는 자유의 대가로 집을 떠날 것을 요구하고, 그저 자유가 있는 가사 도우미로 리처드 가족과 살고 싶었던 앤드류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게 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항상 같이 다닌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었을까? 혹은 바깥세상에서 앤드류가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찾게 하려는 리처드의 배려일 것이다. 온갖 인생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리처드는 죽고 자신이 짝사랑하던 작은 아가씨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있다. 그러나 그녀의 젊을 적 얼굴을 쏙 빼닮은 손녀 포샤와 마주치자 그는 겉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이제는 사랑을 놓치지 않고자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앤드류는 리차드가 보관해준 큰돈으로 자신의 모습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거의 인간의 모습을 얻는다. 공식적 인간으로 인증받기 위해 리차드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국가를 상대로 싸우지만 걸림돌은 늘 앤드류의 '불로장생'(immortality)이다. 혼자 늙어가는 사랑하는 아내 포샤를 바라보는 것도 슬픈 일이다. 결국 아내와 함께 늙기 위해 자신의 몸에 혈액을 돌게 하고 소화 시스템을 장착해 200년을 넘게 산 '바이센테니얼 맨'으로 인정받고 아내와 죽음도 함께한다.

이 영화는 로봇의 사랑이야기를 넘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은 아가씨의 임종 앞에서 "울 수 없다는 건 잔인한 거에요. 슬픔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을 동경하는 앤드류. 그가 로봇임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스스로 시간의 속박에 뛰어 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앤드류는 살아있음보다 더 중요한 가치, 즉 사랑과 연민의 위대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삶의 의의를 단순히 살아있다는 데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유한하기에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가치에서 그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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