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란 수필가

아이들 어렸을 때 서예를 배우게 했던 적이 있다. 뛰어놀기만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행여나 정신집중 내지는 차분한 성격을 유도하려는 적잖은 의도가 있었다. 아이들을 서실에 데려다 주다 보니 멀뚱거리며 있기 보다는 나도 배우기로 작정하고 붓을 들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체력적으로 금방 지치고 싫증이 났다. 나의 덜렁거리는 성격에 오래도록 붓을 들고 쓰다 보면 진저리가 나곤 했다. 그래서 싫증난 엄마와 더불어 아이들도 교내 주최의 서예대회에서 상장을 몇 번 받는 것으로 서예를 그만 두었다.

그러나 딱 한 번 서예의 맛을 체험했던 적이 있다. 남편과 된통 싸우고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마침 서실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서실에 들어섰다. 차 한 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자꾸 서성이게 되고 화난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평소 서예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붓을 들어 화선지에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글씨도 잘 안 되고 어지러운 마음이 글씨에 고스란히 나타나며 흔들리고 삐뚤거렸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글씨가 반듯해지고 고르게 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되고 보니 마음이 평정상태로 되면서 남편과의 다툼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내가 행한 말과 모습이 보였다.

요즘은 그 경험을 되살려 번거로운 서예는 마다하고 줄이 쳐진 노트에 가능하면 반듯한 글씨로 필사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다. 그렇게 쓰다 보면 호흡이 느려지고 마음이 차분해 진다. 갑자기 잊었던 것도 생각나서 체크할 때도 있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큰 아이가 어린 시절, 허리 뒤춤에 무언가를 숨겨가지고 와선 "엄마는 활짝 핀 꽃이 좋아? 아니면 봉오리가 좋아?" 하면서 묻는다. 나는 봉오리가 좋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뒤춤에서 아직 덜 핀 목련꽃 봉오리를 내게 건넨다. 아이의 허리 뒤춤에는 두 종류의 꽃이 다 숨어있던 거였다. 잊고 있었던 이런 보석 같은 시간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성적인 면 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많은 나는 쉽게 열을 받는 다혈질이다. 그렇다고 번번이 누구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내 스스로 발산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에 가기도 하고 운동을 자주 하려고 하지만, 겨울이라 꼼짝하기도 싫고 스트레칭 정도로 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책 한 권이나, 성경책을 모두 필사하려는 원대한 목표는 없다.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전에 하는 준비 작업이다.

최근에 알게 된 70대 어르신은 날마다 일기를 쓰신다. 그 분의 남편은 여섯 살이나 더 많으신데 컴퓨터를 잘 하셔서 부인이 쓴 일기를 손수 책으로 만들어 주셨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인 것이다. 컴퓨터 작업으로 글에 맞는 사진을 넣고 A4용지에 출력해서 제본을 한 것이다.

순수하고 맛깔스런 글도 글이지만 그것을 자신들만의 책으로 만들어 자식들에게 선물하는 노부부가 참 멋져 보인다.

매일 매일 일기를 쓰는 분이라 가끔씩 오는 문자도 참 간결하고 세련됐다. "영란씨, 굿나잇~" 노트에 또박또박 쓰는 것이 일기든 필사든 내 마음과 만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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