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뜨겁게 끓인 구절초 꽃차를 후후 불면서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눈을 감고 가만히 온기를 느낀다.

첫차는 화려함으로, 두 번째는 그윽함으로, 세 번째는 빛바랜 아름다움으로, 네 번째는 순수함으로 마시는 거라 했다. 안산 구릉진 비탈에 구절초가 많았다. 마치 정결한 여인이 하얀 속적삼을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를 땋아 내린 모습, 명징하게 빛나는 그 꽃을 보면 마음조차 조신해진다

. 음력 구월이 들어서면 어머니는 바쁜 가을걷이 틈틈이 구절초를 채취해 처마 끝에 매달아 말리셨다. 동지섣달이 되면 구절초를 삶은 물에 수수를 거칠게 갈아 죽을 쑨 다음 엿기름을 조물조물 주물러 아랫목에 이불을 덥혀 삭히셨다.

전날 새벽부터 시작한 조청은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이 쏙 빠질 무렵에서야 비로소 검고 끈끈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조청이 완성됐다.

드디어 집안에 온통 달콤한 향으로 가득 찰 무렵 비지땀을 닦으시며 종지에 맛만 보이시고는 아직 말간 조청을 검고 끈적끈적 할 때까지 작업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쌉쌀한 하고 달콤한 엿이 완성되었다. 이것을 식히면 딱딱한 갱엿이 된다.

갱엿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수저로 한 수저씩 떠서 콩가루이 묻혀 보관을 하셨다. 어머니는 생약으로 준비를 하셨다가 추운 겨울, 보약 겸 간식으로 가족의 별미로 챙기셨다. 유난히 손발이 차고, 게다가 소화능력도 떨어졌던 나는 사춘기시절 배앓이도 많이 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몸에 온기가 돌도록 구절초 엿을 한 숟가락 먹여주셨다. 다섯 딸들의 몸을 따뜻하게 키워 주신 덕에 결혼을 하여 모두가 자녀를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조카들이 모두 성장해 하나 둘 결혼을 했다.

작년 이맘때, 딸애 때문에 속상하다는 둘째언니의 긴 전화 통화에 남의 일만 같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십이 넘어 결혼한 딸이 첫애를 가졌지만 9주 만에 떠났다고 했다. 안 그래도 늦은 임신으로 노심초사 했던 언니는 몸이 찬 것이 늘 걱정이었다며 보약을 먹여 보아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가졌던 조카며느리가 역시 유산했다고 한다. 둘 다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과로와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 된 것 아닐까 염려 되었지만 그렇다고 퇴직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보니 2세를 위해 어떻게 할지 둘 다 고민에 빠져 있다.

언니와 올케의 안타까운 마음을 바라보며 어찌 이게 그들만의 문제인가 싶다. 직장생활을 하는 예비엄마들은 난임으로 고통 받는 것은 물론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아이가 자란 후 경력단절여성으로 재취업이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일 것이다.

이제껏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순탄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일 것이다. 그들을 보면 구절초 꽃처럼 깨끗하고 청아한 모습 뒤로 쓸쓸함이 보인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구절초는 첫마디가 아홉 번을 꺾기고 나서야 비로소 꽃을 피우듯이 이 시련이 지나고 나면 더욱 강하고 담대한 엄마로서의 모성을 갖출 것이라 믿는다.

엄마는 구절초를 닮아가는 것 인지도 모른다.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때가 되면 산비탈이나 들판 어디서나 꿋꿋이 새싹을 띄워 뿌리에서 꽃잎까지 모든 이들에게 따뜻함과 질병을 치료하여 건강한 몸으로 이롭게 하듯이 어머니 역시 삶의 무게에도 내색하지 않고 온몸을 바쳐 생명을 살려내는 거룩함이 닮았다. 음력 구월이면 구절초를 정성껏 따다 말려 시집간 딸이 집에 오면 달여 먹여주었던 어머니의 지혜가 새삼 그립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을 마신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