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계절이 잠시 내려놓았던 붓을 들었다. 초여름 산은 신록이 푼푼하다. 망울망울 피어난 햇살아래 바람을 타고 꽃잎들이 앞 다투어 터뜨린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둘레길에 올랐다. 청량한 공기만큼 오가는 등산객의 마음도 청명해지는 기운이 느껴진다. 에움길로 들어서자 나무 한그루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름드리 왕 버드나무의 오목하게 팬 몸통사이에 산 벚나무가 뿌리를 박고 함께 자라고 있다. 바람을 타고 온 벚나무 씨앗이 버드나무의 둥치에 앉아 발아를 하여 싹을 틔운 것이다. 셋째이모는 바람 같았다. 바람처럼 매인 곳 없이 당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 다녔다. 심신이 건강하지 못했던 셋째이모는 만혼에 어렵사리 결혼을 하였다. 특별한 직장은 없었지만 마음이 반듯한 이모부는 처가살이를 하며 이모의 뒤치닥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조모님이 세상을 뜨자 집을 나가버렸다. 이모부가 분별력도 없고 사리판단도 부족한 이모와 결혼생활을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위를 섬기는 외조모님의 지극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결혼에 실패하고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이모는 외삼촌과 큰 이모 집을 드나들며 삶을 돌렸다.이맘때였다. 집으로 그 이모가 왔다. 이제 막 마흔을 넘긴 그녀의 남루한 행색에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모의 처지를 짐작하셨으리라.

맏이로써 동생을 떠올리면 늘 가슴속에 모래바람을 일으키셨다. 방 한 칸을 차지했던 나는 이모와 동거가 시작되었다. 학창시절 ,학습에 전념해야 할 밤이면 그녀가 은근히 신경이 쓰였고, 있는 듯 없는듯하면 좋으련만 잔소리에 잠자리마저 편치 않았던 이모가 마뜩치 않았다. 나는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사람은 짐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힘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하시며 달래셨다. 이모는 우리 식구의 눈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의 옆자리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당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린 이모는 날이 갈수록 어머니에게 물기 먹은 솜을 등에 지웠다.

동그랗게 등이 굽은 어머니는 점점 늙어갔다. 그래도 이모에게 모진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니로서 마땅한 도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여고를 졸업할 무렵 무슨 생각이었는지 외삼촌은 이모를 데려갔다. 이모가 떠난 뒤 어머니는 한동안 몸살로 앓아 누우셨다. 그로부터 몇 해 후 이모의 부음을 들은 어머니는 마지막 그녀의 생을 안정적으로 해 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어머니는 그 이전에도 북으로 강제징용 당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어린딸아이를 놓고 집을 나간 작은동서의 딸을 품었고, 큰동서의 종손 역시 자식으로 품었다.

씨앗이 움을 트고 뿌리를 내리기 까지 연약한 움을 감싸고 보호했다. 아홉의 자식과 이모에게 자릴 내주느라 둥치를 점점 불려야만했다. 좀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버드나무에 온 마음이 쏠린 벚나무는 빨간 열매까지 맺었다. 산 벚나무를 뽑아 버려야 버드나무가 온전할 것 만 같았다. 그러나 억지로 뽑아낸다면 나무는 더 큰 상처를 입을 것만 같다. 어머니의 깊었던 마음처럼 큰바람에도 요란스럽지 않게 흐느적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기진했던 어머니의 삶 자락을 들춰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버드나무도 산 벚나무도 둥지에서 꼿꼿하게 잘 자랄 것이다. 버드나무에게 화답하는지 벚나무 작은 잎이 너울거리며 손바람을 일으킨다. 어머니는 그들에게서 힘을 얻고자 그리 사신 것일까.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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