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자료사진 / 중부매일 DB

올해 날씨는 참 유별나다. 봄부터 월 평균 기온이 예년의 그것을 웃도는 이상 현상을 보이더니 한여름엔 그야말로 기록적인 무더위가 9월이 되도록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가뭄이었다. 섭씨 40도 가까이 치솟은 폭염에 농촌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혹심한 가뭄 때문에 어느 해보다도 고통스런 농사철을 보내야 했다. 비 없는 마른장마 끝에 큰비라고는 7월 5, 6일 한 번 내린 뒤로 8월 하순이 다 지나도록 비다운 비 없이 가랑비만 몇 차례 질금거리다 마는 동안 성장기와 결실기의 밭작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빈 깍지만 매달린 콩 수확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소 먹이로 베어낸 농부들이 적지 않다. 이상한 날씨는 가을이 되어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잦은 비와 궂은 날씨가 가을 내내 계속되더니 한겨울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점차 기온이 떨어지고 더러 눈발마저 흩날리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111년 전 을사년 그해의 날씨가 꼭 이랬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 해엔 연초부터 기상이변이 잦았다. 1, 2월엔 거푸 지진이 일고, 5월에는 개성에 큰비가 내렸다. 도성 안에 수백만 마리의 나비 떼가 날아드는가 하면, 춘천에선 한 여름인 7월에 큰 우박이 쏟아졌다. 8월에는 홍수가 나 나무가 뽑히고 집이 무너지는가 하면 바닷물이 넘치기도 했다. 그해 11월 17일, 음력으로 10월 21일이던 그날엔 도성의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에워싼 가운데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수옥헌에서 열린 어전회의를 끝으로 조선 500년 왕업이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5개 조문으로 되어 있다 하여 흔히 '5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나라는 망하고 졸지에 망국민의 신세로 전락한 백성들은 속으로 피울음을 삼켰다. 온 나라가 사뭇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전엔 5적을 박살하고 조약을 즉각 폐기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궁궐 밖 대한문 앞엔 '시일야방성대곡',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민영환이 원통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자 조병세는 아편을 마시고 그 뒤를 따랐으며 이상설은 분김에 돌을 들이받고 실신했다. 홍만식, 이상철, 윤두병, 김봉학, 송병선 등의 죽음도 잇따랐다. 나라가 온통 울분과 비탄에 젖어 피를 쏟고 눈물을 뿌렸다. 그 해의 그 음습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을사년스럽다'는 말을 만들어내고 세월이 흘러 그 말은 '을씨년스럽다'로 변해 요즘도 흔히 쓰이고 있다.

 저물기 시작하는 2016년 끝자락에서 왜 하필 그해 1905년을 떠올리는가? 나라 사정이 꼭 그해 을사년과 흡사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가 서명한 조약문은 달랑 종이 한 장 분량이었지만 그 후환은 뼈를 깎고 살을 녹이는 것이었다.

 망국 40년 동안 우리가 겪은 고통과 피해는 계량이 불가능할 정도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 기간 나라 안팎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 수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지옥 같은 망국민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 때 우리는 마땅히 와신상담 절치부심, 다시는 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며 이를 갈고 속을 썩여야 했을 일이다. 그러나 빛을 되찾은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나라 형편이 을사년 그해와 방불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도대체 무얼 믿고 이리 방자했단 말인가. 무능한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통치 행위로 야기된 일시적 국정혼란을 두고 망국을 걱정하다니, 과민반응일까?

 그러나 지금 나라 사정은 그저 한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대통령의 실정을 탓하거나, 탄핵을 이끌어 낸 '촛불민심'의 위력을 새기는 일조차 부질없어 보일 만큼 절박해 보인다. 주변 강대국들의 물고 물린 이해관계와 힘겨루기는 을사년 그 전후의 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필연이고, 그런 만큼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지만 '자강(自彊)'은 여전히 공염불이었고, 주변국 눈치 보며 줄타기나 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더구나 지금은 핵으로 무장한 '주적'을 머리에 두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라, 무엇으로 이 난국을 극복해 갈 수 있겠는가. 대통령 하나 내모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라 살리는 일이 우선이다. 이제 '대통령' 대신 '대한민국'을 화두로 삼아 나라 살리는 길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순실은 이제 입에 올리기에도 부끄러운 이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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