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수필] 이영희

감미로운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잠에서 깨어난 공주같이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 한껏 우아하게 다가간다.

"아뿔싸! 프리지어였구나."

작년 이맘때 향기를 너무 발산했는지 출산을 끝낸 여인네같이 후줄근해서 무심했는데, 프리지어와 난이 모두가 잠든 밤에 듀엣 팀을 구성한 듯 온 집안을 맑고 향기롭게 채운 것이다.

레몬향보다 그윽한 프리지어와, 난도 김 씨 성이 있느냐고 농담을 한 김기화난의 향기가 아쉬워서 헛일 삼아 물을 주긴 했지만 이렇게 다시 피어나다니. 새침한 모습과 향기에 반해서 아침 짓는 것도 잊어버리고 감탄을 하며 눈 맞춤을 한다.

8년 전 좀 넓다 싶었지만 직장이 가까워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니, 넓어서 베란다를 트지 않아도 되는데 전체적으로 확장공사를 해 놓았다. 가져온 난 화분이 많아서 그것을 놓으려고 실내 정원을 만들었지만 일반 꽃과 정원수를 안에 심고 가장자리에 난 화분을 둘러놓는 것으로 귀착을 보았다. 처음에는 출장 정원사가 격월간으로 꽃과 나무를 갈아주어 늘 꽃이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서 이곳이 낙원이지 싶었다.

AS 기간이 끝나고 대표가 바뀌더니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 오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곳을 알아보았으나 마땅하지 않아 그때그때 피는 꽃을 사다가 빈 곳을 채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화분의 꽃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는 게 많아서 정성이 부족한가 하고 속앓이를 했는데 꽃이 진 화분을 처리하면서 인공 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면 다시 필 수 있는 자연의 흙이 아니고 일정 기간 한 번만 화려하게 피고 말도록 만든 것 같았다.

여성들의 각선미를 살려주는 스타킹을 쉽게 올이 나가지 않게 만들면 스타킹 장사 다 굶어 죽는다던 친구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피식 웃는다.

은하수의 별같이 피어나서 물을 준 것에 부응 하는 것을 보면 프리지어는 꽤 의리가 있는 녀석이지 싶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꽃소식은 동구 밖에도 오지 않았는데 나날이 생기를 띠는 정원수 사이로 피어나는 봄꽃은 볼수록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오늘도 고 예쁜 녀석들을 처음 본 듯 눈 맞춤을 하는데 한쪽에서 금속성의 파열음이 들린다. 공기 정화 식물이라고 집들이 화분으로 들어온 것을 옮겨 심은 정원수 뿌리 밑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양파를 물병위에 얹어 한 쪽은 사랑을 주고 한쪽은 무관심하면 사랑을 받은 양파가 훨씬 빨리 자란다고 한다. 정원수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자격지심에 주인의 사랑을 못 받아서 심통이 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마침 화원을 하는 지인이 방문하여 이른 봄의 행복이 여기 다 머물러서 늘 밝은 모습이라며, 큰 키 정원수는 뿌리도 튼실하여 바닥을 뚫을 수 있으니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하나둘 가지를 쳐내는데 그새 정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산야에서 뿌리를 내렸으면 이런 수난은 겪지 않아도 될 터인데 몇 년간이나 공기 정화를 해 주고도 토사구팽을 당하다니 안쓰러웠다.

일본인들이 많이 기르는 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잉어가 있는데 어항에서 기르면 5~8센티미터 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더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하니 놀랍다. 이렇게 노는 물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성장하여'코이의 법칙'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코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우리만 생각하고 큰 키 정원수를 실내에 묶어둔 것은 아닌지.

코이같이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뿌리내리고 살라고 분을 뜨는데 아기 살결 같던 프리지어 꽃잎 하나가 똑떨어진다. 지는 꽃을 보기가 안쓰러워 꽃 선물을 싫어한다던 지인이 생각났다. 법정 스님도 매이게 되면 집착이 된다고 기르던 난 분 하나까지도 보냈다고 무소유를 말씀하셨는데...

어느새'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소월은'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고 체념을 통한 이별의 정한을 노래했는데 감정도 시류를 따라가는가. 이른 봄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는데 그것은 별리를 잉태하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나 보다. 프리지어는 향기도 좋지만 출발을 응원한다는 꽃말이 좋아서 가져온 그날을 생각하며 이른 봄의 단상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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