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봄 냉이(자료사진) / 뉴시스

거실 중앙까지 들어오는 봄 햇살이 아른아른 흔들린다. 현관문을 열고나오니 그 햇살이 눈이 부셔 눈썹위로 손차양은 하였지만 집안에서와 달리 바깥바람이 아직은 살짝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닫혔던 창문을 활짝 열어 봄기운 가득 받아두고 창고에서 겨우내 쉬고 있던 호미를 챙겨들고 주머니에는 검은 봉지를 구겨 넣었다. 뒷짐을 지고 걷는 손 위에서 호미자락이 춤을 춘다. 그리운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제 딴에도 설레는 모양이다. 얼마 뒤면 사과 꽃과 복사꽃이 만개할 과수원에서는 봄을 준비하는 농부들이 가지치기에 한창이다. 봄나물로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네는 냉이로 입맛을 돋우어야겠다는 생각에 산책 겸 길을 나선 것이다.

냉이는 어머니를 통해 어린 내게 나생이로 먼저 다가왔다. 소쿠리 가득 담긴 나생이를 흐르는 개울물에서 씻어내면 쭉쭉 뻗은 흰 다리를 드러내던 나생이. 팔십이 넘으신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냉이라는 이름 보다는 나생이로 남아있다.

냉이의 종류는 4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나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여럿 있다고는 하는데 내게 익숙한 이름은 황새냉이 싸리냉이 다닥냉이들이다. 냉이와 함께 봄을 대표하는 쑥과 달래는 올라오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냉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엎드림과 낮춤으로 겨우내 뿌리만은 성하게 하여 봄을 기약한 것이다.

흙으로 미처 돌아가지 못한 낙엽들 사이로 이름 모를 잡초들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어느 만큼 지나왔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찾는 냉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눈에 띄는 놈은 호미를 들이대기가 민망할 정도로 아직은 작고 뿌리가 없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아마도 우수를 앞둔 어느 날쯤 단양에서 캐온 냉이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인가 보다.

농번기로 바빠지기 전에 한번 다녀가라는 지인의 연락에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간 단양군 파랑리. 리본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지인의 집엔 어디선가 잔설이 녹아내리는지 마당 밑으로 돌돌돌 흐르는 개울물이 먼저 반겨주었다.

같은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만나면 아름다운 관계가 저절로 형성된다. 큰 아이와 같은 반 자모로 만나 알게 된 그녀는 착하고 고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느닷없는 귀농 소식에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원하던 삶이라 만족한다고 한지도 10년이 되었다. 정을 나누려면 그 집 간장 맛부터 봐야 된다고 했는데 우리는 확실하게 정 나눔의 의식을 잘 치르고 있었다. 바람의 손길이 분주한 가운데 햇볕 좋은 밭 자락에 냉이를 캐러 나갔다.

김순덕 수필가

마치 동상에라도 걸린 듯 불그죽죽한 모습과는 달리 쭉 뻗은 굵은 뿌리의 냉이가 지천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에서 마음 편하게 자란 탓인지 뿌리 실한 냉이가 산삼을 캔 듯 횡재 한 기분이었다. 넉넉하게 캐온 냉이를 이웃사촌에게 봄소식으로 나눠주니 목련꽃처럼 환한 미소로 고마워한다. 콩가루를 입힌 냉잇국은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약한 중불에서 급하지 않게 끓여내야 옷이 벗겨지지 않고 뽀얗게 보글보글 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수한 냉이향이 모처럼 입안 가득하다. 달고 고소한 냉이나물 무침도 온몸 안에 새봄을 뿌려주었다. 집안 가득 퍼져 나갔던 그날의 냉이 향이 코끝을 스칠 때 일찍 봄바람의 손에 이끌려 나온 냉이 꽃이 벌써 눈에 띈다. 짧은 봄에 마음이 조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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