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필] 김윤희

필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이해인님의 詩 '3월의 바람' 中


겨우내 모진 바람이 휘돌았지만 3월의 바람은 결국 움을 틔웠다. 봄을 출산하기까지의 진통은 그 어느 해보다 컸다. 태동을 느끼면서 시작된 '임신중독증'이라는 병세는 유난하여 온 국민들을 힘들게 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 언론매체는 물론, 평범한 소시민들까지 병증의 심각성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하고 민간요법을 들이댄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호기를 맞은 듯 목소리를 높인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을 맞고 싶은 열망은 수백 수천의 촛불을 켜들게 했고, 광장문화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필까 말까, 열까 말까' 문을 열고 싶은 바람이 결국 봄을 출산했다. 난산의 고통을 겪고 탄생된 것이다. 봉합과 치유의 과정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다.

오랜만에 따사로운 햇살을 이고 부드러워진 바람결을 느낀다.

"카톡, 카톡"

와르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산수유와 팝콘처럼 터지고 있는 매화 사진이 십여 차례 날아온다. 남도의 봄기운을 듬뿍 담아 띄운다는 메시지와 함께 스마트폰 화면에 꽃들이 가득 피어난다. 초등학교 동창생이 미리 보내준 봄 향기가 상큼하다. 남녘에는 벌써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꽁꽁 언 세상 속에서도 안으로 꽃눈을 품고 있다가 이리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자연의 이치가 새삼 경이롭다. 햇빛과 공기, 늘 같은 듯 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바람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경관이 확연히 달라지는 현상이 신기하다.

문득 대만 여행에서 보았던 예류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자로 야류(野柳)라 쓰지만 버드나무와의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타이베이 북부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사암과 용암이라는 서로 다른 물성이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생성된 장엄한 자연의 이치를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촛대모양의 바위를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자연물이 형성되어 있지만, 사람의 흉상을 한 바위는 벌집 모양의 검은 머리에 황토색 살결을 이루어 더욱 실감난다. 마치 잘 다져진 우리네 시골 황토색 흙 마당에 각양의 바위 조각상이 불뚝불뚝 군락을 지어 늘어서 있는 형상이다. 순전히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바닥도 작품도 만져보면 흙의 감촉이 아니라 딱딱한 돌의 느낌이다.

옛날 이곳은 원래 바다 속이었다 한다. 그 속에서 다져진 점토질 층은 작은 진흙 입자가 퇴적되어 형성된 퇴적암으로, 오랜 시간동안 융기를 하며 퇴적층들이 지표 위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운 흙 마당으로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나 보다.

흔히 버섯바위라 불리는 기암들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여왕머리'모양을 한 석상이다. 고대 이집트의 왕비 크레오파트라의 두상을 닮았다 하여 가장 인기가 높다. 머리 부분은 검은 곰보딱지처럼 뽀글뽀글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듯한 형태로, 옆모습에서 귀티가 흐른다. 그 아래로 가늘게 흘러내린 목선의 우아함과 황토색 결 고운 속살을 드러낸 여인의 상반신 상은 신이 빚어낸 걸작 중의 걸작이다.

사람이 감히 조각할 수 없는 경지를 본다. 서로 다른 물성끼리의 부조화속의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그와 함께 사진 한 장 찍겠다고 늘어선 줄이 장사진을 이룬다. 다른 조각상과는 달리 가까이 갈 수도 없다.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도록 그 둘레에 돌멩이로 경계를 표시해 놓고 경호를 한다. 제대로 여왕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여왕의 운명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전해지고 있다. 풍화작용으로 인해 가늘어진 목이 점점 더 가늘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과 바닷물, 그리고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 놓은 걸작이 다시 이로 인해 스러져가고 있는 아이러니가 어디 예류지질공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뿐이겠는가.

그 어느 해보다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으며 깨달음을 얻는다. 바람의 힘, 사람살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생태계의 질서가 철저하다는 걸…

돌아 나오는 길에 천 길 낭떠러지에서 어린 학생의 생명을 구한 어부의 동상이 손을 허리에 짚고 우뚝 서있다. 뭉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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