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얼었던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를 맞아 농업기술센터에서 '우리 장 함께 담그기' 체험교실에 참가했다. 것대산 기슭에 있는 체험장에 도착하니 어제까지도 변덕스런 날씨는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맞이했다. 벌써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 꽃차를 마시며 된장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이었지만 정서를 같이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금방 친해졌다. 장독대가 빼곡하게 들어선 뒤뜰에는 저마다 이름표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날은 메주를 씻어 항아리에 넣고 대나무 회초리로 메주가 뜨지 않도록 엮어서 지그시 눌러 놓고 소금물과 대추 서너 개, 마른고추, 숯덩이를 넣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릴 적 뒤꼍에는 족히 백년이 넘는 항아리와 그보다 작은 항아리가 옹기종기 장독대에 줄지어있었다. 그 중 씨 간장 항아리 위에는 정월보름이면 팥 시루떡을 올려놓고 집안의 액운을 막고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비손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독대는 나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초여름 아까시나무꽃에서 풍기는 자연향수가 뒤꼍을 진동시킬 때면 장독대에 등을 기대어 엄희자, 민애니의 순정만화에 푹 빠져 살았다. 로맨스 상상은 내 작은 몸을 감싸고 하늘을 둥둥 떠다니게 했다. 나의 사춘기 꽃이 핀 자리는 지금은 아프게 터만 남아있다.

예로부터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절대미각을 갖은 아들은 어릴 적에 먹던 된장찌개가 그립다며 주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도 그 맛을 낼 수가 없다. 손맛이 좋은 친정어머니께서 세상 뜨시기 전 까지 갖은 양념과 야채를 전해주셨으니 그 정성이 곧 맛의 비결이었다. 생각 끝에 유기농 농사를 지어보자 마음먹고 일 년을 시도해보다가 두 손 두 발 반짝 들었다. 농사는 못 짓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장을 만들어 옛 맛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체험장을 찾게 되었다.

며칠 뒤 장 가르기를 하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지난 2월 소금물을 부어놓았던 메주를 조심스레 꺼냈다. 간장과 분리한 메주는 다른 항아리에 옮기고 잘게 부수어서 으깬 다음 소금과 메주가루, 고추씨가루를 섞어 꾹꾹 눌러놓았다. 항아리 속에서 된장은 얼마간의 숙성기간을 거치며 맛있게 익어갈 것이다. 진국의 맛으로 나물을 조물조물 무치고 질박한 뚝배기에 된장도 보글보글 끓여서 가족들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김민정 수필가

콩은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서 새로 만들어진 성분들이 특유의 맛과 향기를 만들어낸다 된장은 3년이 돼야 숙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글루탐산 소듐' 으로 감칠맛이 난다고 한다. 고기든 젓갈이든 숙성이 되어야 감칠맛이 나게 마련이다. 삼굿 같은 날씨에도, 북풍한설 혹한에도 유난 떨지 않고 가만가만 제 몸을 달래가며 감칠맛으로 거듭나는 된장은 입맛을 살려내는 요리 닥터이다. 나 자신도 고집과 아집을 부수고 무엇과도 잘 뒤섞여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면 쓴맛은 빠지고 감칠맛이 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감치다, 눈앞이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감돈다는 말이다. 감칠맛이 난다는 말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주고, 보고 싶고, 마음에 품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