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지난 2012년 시민들이 유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장터까지 횃불 행진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2017.02.23.

오는 4월 1일은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99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기미년인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는 천안, 진천, 청원, 연기 주민 3000여명이 모여 3단계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항일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시작되었다. 조인원은 시장에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따라 크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세워 거리를 누비며 대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장에서 약 50보정도 떨어진 병천 헌병주재소의 소산 소장 등 일경 5명은 만세 소리에 놀라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쯤 일어났다. 사상자들의 친지들이 시신을 헌병 주재소로 옮기고 항의를 하자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으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여 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같은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를 하였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를 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군중이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9명에 달했다. 유관순 열사는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한 7명의 친인척을 잃었다. 김구응 의사와 노모 최정철 지사도 독립만세시위 현장에서 순국했다. 그리고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여 명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호서지방 최대규모로 독립선언서를 지역화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필자가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자체 기초해 선언한 것으로 밝혀진 곳은 경남 함안과 하동을 비롯해 3-4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림 대표인 이백하 선생이 구국동지회 명으로 자체 제작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는 539자로 비록 길이가 짧지만 한민족의 굳건한 항일독립의지와 기개가 실감나게 잘 나타나 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그런데 아직까지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찾지 못해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이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천안시와 국가보훈처는 20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대비, 전국적으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로 하여금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혀내고, 2009년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일원에 조성된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에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전문을 새겨 놓은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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