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번기 일손 돕기부터 어르신들 말벗까지… 情 나누며 소통

왼쪽부터 정명숙, 전분남, 이춘희, 강정심, 오경숙 이장.
왼쪽부터 정명숙, 전분남, 이춘희, 강정심, 오경숙 이장.

씩씩한 중년 여성 다섯 명이 작은 정원 쉼터에 모여 있다. 주변에 높은 아파트가 빙 둘러 있지만 사람의 향기가 가득해 보인다. 아늑한 쉼터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둥지 속의 참새 같다.

주부들 대화치고는 내용이 생경하다. "산물벼 수매 희망하는 사람 내일까지 신청하라는데 자기네는 했어?" "아니, 문자를 좍 돌려봐야지." "산물벼가 뭐래?" "금방 수확한 벼를 말하는 거야." "농가가 몇 집 안 되는데 전화해 봐야겠네." 이 아파트에 사는 이장님 다섯 명의 대화 장면이다. 산물벼 수매에 관해 면사무소에서 이장들에게 보낸 문자를 보고 하는 말이다. 차나 한잔하자고 모였는데 업무 처리하는 자리가 되었다.

아파트 외곽 인도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아파트 외곽 인도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나이가 고만고만해 보이는 다섯 이장님은 청주 시내에서 옥산면에 있는 A아파트단지로 이사 온 사람들이다. 사연도 가지가지다.

맏언니 격인 전분남(63) 이장은 시내에 살 때부터 옥산 국사리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왔다 갔다 하면서 맛집을 몇 번 들렀는데 왠지 활기 넘치고 정감 있는 마을처럼 보였다. 무슨 일을 하든 잘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아파트 분양 소식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살다 보니 여기에 둥지를 틀고 노후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더 나아가 주민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이장 일을 보기로 했다.
 

모내기 하는 날 모판 나르는 이춘희 이장
모내기 하는 날 모판 나르는 이춘희 이장


이춘희(62) 이장은 치열한 직장 생활을 끝내고 노후를 고민하다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남편과 함께 둘레길을 산책하고 동네 맛집도 찾아내며 천천히 마을에 스며들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이웃이 생길 무렵 이장 모집에 참여했다. 마을에 대해 좀 더 알고 주민들과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늘 찾고 있다. 요즘엔 혼자 사는 어르신들을 방문해 말동무하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조그만 텃밭도 가꾸며 정겨운 옥산 사람들에게 빠져들고 있다.

강정심(61) 이장은 5년 전, 자연 활동을 많이 하는 소로초등학교에 손녀를 보내려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농촌을 좋아해서 농번기에는 일손 돕기 봉사에도 열심이다. 지난봄 모내기 철에는 트랙터 운전을 배워서 모판을 실어 나르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요즘에는 콤바인 팀에 합류해 벼 수확하는 일을 돕고 있다. 황금 들녘과 넓고 푸른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일할 땐 힘들어도 논 주인이 준비해준 새참을 먹고 나면 기운이 솟는다고 한다.
 

마을축제에서 풍물 공연하는 정명숙 이장
마을축제에서 풍물 공연하는 정명숙 이장


정명숙(58) 이장은 조금만 밖으로 나가도 전원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점이 제일 맘에 든다고 한다. 주민들과 친해지려고 봉사단체나 주민자치프로그램에 참여해 어울리고 있다. 특히 풍물놀이에 열중하고 있는데 마을축제에서 단원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오경숙(56) 이장은 남편 직장 문제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젠 아들 며느리까지 옥산에 와서 살고 있다. 아직 청주 시내에서 하던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서히 줄이고 이곳 주민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파트 입구에 화분을 조성해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파트 입구에 화분을 조성해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다섯 명 모두 A아파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이장 일을 보면서 자매처럼 금방 친해졌다. 이장의 역할은 면 행정 사항을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면에 전달하는 일이지만 그 외에도 어르신들의 불편 사항이나 주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노인정과 아파트 주변을 살펴보고 잡풀 제거나 꽃 가꾸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한 사람이 좋은 의견을 내면 다섯 명이 똘똘 뭉쳐서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가끔 마을 뒷산에 함께 오르면서 서로 속사정까지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어간다.

 왼쪽부터 오경숙 강정심 이춘희 전분남 정명숙 이장.
 왼쪽부터 오경숙 강정심 이춘희 전분남 정명숙 이장.

이들에게도 아쉬운 점은 있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과의 화합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로 다가온다. 그럴수록 아파트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주민들과도 자주 만나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지난 9월에 있었던 마을축제에서도 주민들과 어울리는 행사에 많이 참여했다. 마음을 열고 소통하려는 이유는 하나다. 이들은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각종 행사가 거의 없어서 주민들을 더 많이 만나지 못한 것도 큰 아쉬움이다.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앞으로 작은음악회나 전시회 같은 문화행사를 유치해서 아파트 주민은 물론 다른 마을 주민과도 함께 어우러지는 일이 많아지길 소망하고 있다. 이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살기 좋은 아파트, 재미있는 마을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고 있다. 다섯 이장님의 향기로운 열정이 아파트 건물보다 더 높이 솟아오른다.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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