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말이야" 한 두마디 거들며 그 시절 추억속으로…

청주 옥산면 신촌리 새말 주민들이 오랜만에 마을회관 앞에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청주 옥산면 신촌리 새말 주민들이 오랜만에 마을회관 앞에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 마을에 여적지 이런 일은 없었어."

동찬이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한마디 한다. 마을회관 안에 빙 둘러앉은 동네 사람들은 "그려!" 하면서 박수까지 친다. 현관 앞에서는 복순 할머니의 구성진 노랫가락을 따라 나이 많은 청년 몇 분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장님은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며 주민들의 흥을 돋운다. 햇살 좋은 가을날, 신촌리 마을회관에서 생긴 일이다.

싱들벙글 간식을 들고 오는 박준순 이장.
싱들벙글 간식을 들고 오는 박준순 이장.

행정상 마을 이름이 신촌리(新村里)이지만 사람들은 새말이라고 부른다. 동네 맨 안에 있다고 해서 '안새말', 그중 가구 수가 많다고 해서 '큰새말', 동네 끝에 있다고 해서 '끝새말'로 나뉜다. 넓은 들판 입구에 있는 마을은 그대로 '들판'이라고 부른다.

신촌리 마을회관에서는 한 달 동안 매주 화요일마다 시민기록활동가들이 찾아와 마을기록사업을 벌였다. 새말 동네에 관한 이야기와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전해 들으며 영상과 인쇄물로 남기는 작업이다. 그동안 너무 심심해서일까, 아니면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일까, 어르신들 대부분이 마을회관으로 모였다.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 50여 년의 새말살이에 대해 말했고, 누군가는 옆에서 말을 거들기도 했다. 어느 틈에 맛있는 군밤을 슬며시 놓고 가는 분도 있다.
 

인터뷰 촬영하면서 웃음보가 터진 윤금자씨.
인터뷰 촬영하면서 웃음보가 터진 윤금자씨.

"우리 동네는 애호박이 유명햐. 농사를 잘 지어서 돈들을 많이 벌고 있지." "요새는 농사지으려고 젊은이들이 하나둘 들어와서 동네가 달라졌어." "여기는 앞내 미호강과 뒷내 천수천이 있어서 옛날 추억이 많지." "저쪽에 가면 문화재로 지정된 박훈 신도비가 있어." 마을을 소개해달라는 활동가의 말에 주민들은 시새워서 자랑한다.

신작로 미루나무이야기를 하는 박앙규씨.
신작로 미루나무이야기를 하는 박앙규씨.

마을 앞길에 대한 앙규 씨 이야기가 흥미롭다. "우리 어렸을 때는 마을 앞 신작로에 미루나무가 있었어요. 이승만 자유당 시절에 미루나무를 절반씩 다 잘라냈다고 해요. 그다음엔 포프라나무를 심었다는데, 미루나무를 잘라내서 자유당이 망했다고 하는 어른들 이야기도 더러 들었지요. 새로 심은 포프라나무가 많이 컸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몰래 나무를 베어 공회당 짓는 데 썼다고 해요. 그런데 그 공회당은 불이 나서 없어지고, 93년도에 마을회관을 2층으로 지었어요." 나무 얘기로 시작해 오래된 정치사와 마을회관 역사가 다 나온다.

꽃가마 타고 시집가던 날을 이야기하는 연규순씨.
꽃가마 타고 시집가던 날을 이야기하는 연규순씨.

새말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규순(75) 씨는 쑥스러운 듯 뒤로 빼기만 하다가 말문이 터졌다. "요 너머 군줄에서 살다가 안새말로 이사 와서 신랑을 만나 일찍 열아홉에 시집을 갔는데, 우리 동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꽃가마를 타고 요기서 조기까지 다섯 집을 건너서 시집을 갔어. 그런데 오후 네 시쯤 저 위에 담뱃집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녁에는 시집 큰어머니가 돌아가실라고 한다고 그래서, 바로 그리 넘어가느라고 빨강 치마 노랑 저고리를 다 벗어 냇비리고 큰 집으로 갔어. 그래서 장사지내고 그러느라고 시집간 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규순 씨의 하소연을 듣는 동네 할머니들은 안쓰러워하면서도 위로는커녕 손바닥을 치며 깔깔대고 웃기만 했다.

아직도 청년 같은 새말 이장님은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실 웃음을 짓는다. 마치 어린아이들 재롱을 보는 듯한 부모의 미소를 짓다가도 어느 순간 부모님을 공경하는 따뜻한 효자의 표정이 교차한다. 이장님도 새말 출신이라 마을 어른들이 형님이고 누님이며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나 다름없다.

무슨 일이든 지나간 일은 마술처럼 아름답게 생각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옛이야기 하는 새말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선하고 아름다운 빛이 가득하다. 아기의 눈빛으로, 청년의 눈빛으로, 젊은 새댁의 미소로 이야기한다. 어찌 지나간 일만 아름다울까. 도란도란 옛이야기 하는 이 시간과 공간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뭣 좀 만들어 보자구!" 누군가 불쑥 말을 꺼낸다. 순간 마을 분들 귀가 쫑긋한다. "뭘 만들어?" "아니, 맨날 윷이나 놀지 말고 우리도 뭣 좀 만들어서 노래반을 하든지, 연극반을 하든지, 풍물반을 하든지, 뭐라도 하면 좋지 않겠어?"

50여년 이어져 오는 마을 서류
50여년 이어져 오는 마을 서류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새말 사람들은 이제 지나간 일만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무얼 할까 궁리하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뻔한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앞일을 말하고 그려보는 사람은 분명 청춘이다. "그럼 우리 무슨 일을 해볼까?" 물음을 던지는 순간 그냥 어르신들이 아니라 다시 청년으로, 새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새말 사람들 마음속에 황금빛 가을바람이 출렁인다.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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