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첫 6·25 국군 가매장지서 유해 1구·유품 다수 발견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6·25의 말없는 죽음, 비오는 오늘에야 별로 뜨다'

1996년 6월 24일,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연리에서 6·25 전쟁 당시 숨진 국군의 유해가 중부매일 취재진에 의해 발굴됐다. 육군 전사자 가매장지 충북 첫 사례로 기록된 이날의 사건으로 야산에 외롭게 묻혀있던 청년의 시신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유해발굴의 시작은 그날의 총성을 잊지 못한 마을청년 백석천씨로부터 시작됐다.

6·25 전쟁 당시 17살이었던 백씨는 중부매일에 "6·25전쟁 당시 마을사람들이 국군 희생자 2명을 귀재마을 앞산에 묻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며 "죽기 전에 국립묘지에 안장시켰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옥천 귀재마을 주변은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인민군의 주된 퇴각로였다. 인민군을 쫓던 국군은 장연리에서 3일간 전투를 했다. 백씨 등 마을사람들이 묻어준 국군 희생자는 척후병으로 활동하던 청년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인민군 매복공격에 전사했다.

중부매일 취재팀은 백씨와 함께 유해 수습에 나섰다. 보은-옥천 간 19번 국도에서 6㎞ 정도 들어간 산골짜기에서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 1구가 수습됐다. 유해 옆에는 당시 국군이 사용했던 칼빈소총 부품, 실탄 1정, 시계, 혁대, 군복단추, 노리쇠, 군복조각, 수통 고리 등 유품도 수습됐다. 특히 시계에는 '815816 9122'이라는 제조번호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다만 또 다른 국군의 유해와 신원확인에 필수적인 군번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취재진은 국방부에 이 같은 사실을 전달, 유해발굴팀을 구성토록 했다.

당시 대전국립묘지 측도 "주변 유품을 볼 때 국군임이 틀림없다"며 신원여부와 관계없이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한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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