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1956년 9월 개원… 1990년 폐업 후 주차장으로 탈바꿈

6년전 새성당을 지으면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 터 /김명년
6년전 새성당을 지으면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 터 /김명년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6·25 전쟁 이후 1956년부터 1990년까지 증평지역 주민들의 아픈 곳을 진료해주던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이하 메리놀병원). 증평성당 안에 병원을 개원하고 메리놀 수녀의사 1명과 간호사 수녀 2명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1990년 폐업 이후 6년전까지만해도 병원 건물이 남아있었지만 당시 새성당을 지으면서 메리놀병원이 있던 터는 주차장으로 변해 메리놀병원에 대한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이에 대해 주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가운데 다행히도 증평군에서 메리놀병원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자료를 모아 정리중으로 이에 대한 기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메리놀병원은 어떻게 충북 증평에 자리잡게 됐을까?

리어카 타고온 환자들. / 증평군 제공
리어카 타고온 환자들. / 증평군 제공

메리놀병원을 지은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는 외국에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벌이는 유럽 교회에 자극을 받아 아시아 지역의 전교를 위해 창설됐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 복구 및 의료사업 지원에 주력한 메리놀외방전교회는 1953년 충북지역을 위임 받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56년 9월 괴산군 증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게 됐다.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이태준 신부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료선교를 펼치던 메리놀 수녀회에 충북도에서 의료 선교를 요청했다.

메리 오거스타 호크 의사수녀가 긴급환자와 일반환자를 구분하고 있다. / 증평군 제공
메리 오거스타 호크 의사수녀가 긴급환자와 일반환자를 구분하고 있다. / 증평군 제공

1955년 충북 음성에 병원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봉원동 증평읍장과 손승모 신도가 증평에 병원을 유치하고자 청주교구청을 방문하고 사비를 들여 증평성당에 땅을 기부했다.

이에 증평성당은 수녀원을 건축하고 그 안에 숙소를 마련해 메리놀 수녀의사 1명과 간호사 수녀 2명으로 메리놀병원을 개원하고 운영하게 됐다.

1976넌 교구 이름과 병원이름이 같고 교구(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세금이 많아 증평천주교메리놀병원을 폐업 신고하고 '증평수녀의원'으로 개원했다.

1978년에 메리놀수녀회와 신부회가 각각 독립적 조직으로 활동했고 메리놀신부회가 실질적으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메리놀수녀회에 병원 관활을 이임했다.

병원 건물은 그대로 사용하고 병원의 정책, 행정, 재정 등 전반적인 운영을 수녀회가 하게 됐다.

1956년 9월부터 병원이 완공된 12월 8일까지는 장날에만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장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교리문답수업이 열리는 건물에서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환자 이야기 듣는 애나 볼란드 의사수녀./ 증평군 제공
환자 이야기 듣는 애나 볼란드 의사수녀. /증평군 제공

1957년 2월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로 시작해 장날 외래진료만 했음에도 소문이 퍼져 하루에 30명 이상 환자가 찾아오고 5월부터는 일일 진료를 실시했다.

메리놀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정기선(81) 씨는 "진료를 위해 방문했던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선게 병원 앞부터 증평 지서까지 500m나 됐었다"며 "리어커를 타고 오는 사람, 길바닥에 누운 사람 등 진료를 봐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하루에 진료 볼 수 있는 인력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중증환자 여부를 따져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만 진료를 보고 갔다"고 말했다.

교구로 오지 못하는 먼 곳의 신자들과 병원까지 올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소 17(괴산, 진천, 음성, 주덕, 미원, 오송, 오창, 청주 등) 지역을 순회진료 하기도 했다.

메리놀병원은 뱀독 치료로 유명해 충북은 물론 전국에서 찾아 병을 고쳤을 정도였다.

메리놀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정기선씨. / 이지효
메리놀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정기선씨. / 이지효

정기선 씨는 "제주도에서 뱀에 물려 살이 썩어가던 사람도 메리놀병원에서 고치고 갔던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

1967년에는 장기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머물 병실이 없어 직원들이 병원 인근에 숙소를 매입해 '사랑의 집'이라고 명하고 그곳에서 환자들이 장기투숙하며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실처럼 사용했다.

1975년에는 의료협동조합을 시작했고 이듬해 증평수녀의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76년 증평수녀의원 현판식. / 증평군 제공
1976년 증평수녀의원 현판식. / 증평군 제공

1979년에는 공중보건위생에 기여한 공로로 로즈 게르시오 의사수녀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는 통증 클리닉을 개설하고 이후 충북지역 14개 진료소에서 메리놀의료보험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1989년 국민의료보험으로 통합됐다.

당시 청주 간호대 학생들에게는 이곳에서의 실습이 큰 경험이었다.

정 씨는 "4명이 1팀으로 실습을 나와 수련했었다"며 "다른데보다 환자도 많고 병명도 다양했기 때문에 굉장히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병원을 둘러싼 환경이 급격히 변했다. 산아제한으로 소아과 업무가 줄고 공중보건상태가 좋아졌고 국민건강에 대한 책임이 정부의 권한으로 옮겨갔다.

수녀회는 증평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하에 1990년에 병원을 폐업하기로 결정했다.

정 씨는 "폐업 이후 의료진은 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프리카 케냐로 이동해 진료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 씨는 "나를 비롯해 메리놀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사람들이 3명 남아있는데 병원 건물은 없어져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며 "그래도 증평군에서 메리놀병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것을 남긴다는 것에 위안이 든다"고 밝혔다.

김형래 충북도 문화재위원은 "건물이 남아있다면 근대 의료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됐을 것"이라며 "앞으로라도 현재 남아있는 충북의 유산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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