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석민 충북도법무사회장

애록(aerok) 고지를 두고 남북이 대치하던 순간 짙은 안개 저 너머에서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북한군의 애절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국군도 같이 부른다. 영화 고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앞둔 장면이다.

연재의 마지막 어떤 영화를 넣어야 할지 고민 끝에 '고지전'이라는 2011년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왜 전쟁영화냐고 묻는다면 '청주 여중생 사건' 속 미소와 아름(의붓딸)은 100일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 놈의 전쟁은 언제 끝나느냐!"는 대사 속에서 "가해자는 도대체 언제 구속되는 거냐!"는 미소의 말이 들린다. 전쟁 속에서 이념도 명분도 없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싸운다. 그 장면에서 아름을 본다.

2021년 5월 10일 미소는 "그래도 아름이 좋아!" 말한다. 미소는 당연히 아름을 싫어하고 멀리해야 했다. 증거를 찾고자 아름을 만나던 미소는 범죄에 방치된 한 소녀를 보았고, 점차로 그 친구가 이해가 됐다. 그러나 가해자를 알면서도 100일이 넘도록 구속조차, 분리조차 시키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미소는 아름이 그동안 왜 침묵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미소가 아름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아름이 미소에 대한 죄책감만 없었다면 둘의 죽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서로 너만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상대를 죽이고자 대치하면서 상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무명용사들의 노래처럼 두 아이는 서로를 인간으로, 친구로 본 것이다.



'청주 여중생 사건'에 대해 말은 넘쳤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지만 그 실체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밝히지 않았다. 마치 자동 응답기처럼 '잊지 말자' 반복되는 말은 이 사건의 무게를 가볍게 했을 뿐이다. 우리 어른들은 두 아이가 죽을 때까지 무능했고 죽고 나서는 비겁했다.

다행히도 항소심 판결은 두 아이의 극단적 선택의 원인으로 A씨의 범행 부정, 아름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 원인이 있음을 밝혔다. 몇 줄 안 되는 이 문장을 위해 유족들은 1년 넘게 싸워왔다. A씨의 직장에, (도저히 가고 싶지 않지만) 범행현장도 찾아가고, 미소와 아름의 친구들을 일일이 만나서 도움을 구했다. 두 아이의 친구들도 힘들어했다. 상처를 드러내서 또 상처를 받는 전쟁을 1년을 넘게 치렀다.

몇몇 이들의 "이 아이들만 성폭력으로 죽은 건 아니고..."는 솔직한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도 없이 많단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 A씨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며 우리를 비웃었다. 누군가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았다. "가해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은 맞네!" 그렇다. A씨의 지적은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

김석민 충북법무사회 회장<br>
김석민 충북법무사회 회장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또 다른 미소와 아름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나마 청주 여중생 사건으로 인해 대법원은 친족 성폭행 양형을 바꾸었으며, 법무부는 아동학대 진술분석 기법을 강화하고, 국회는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특별법을 개정 발의했다. 아쉬운 것은 형사 절차에서 피해자는 제3자에 불과한 것에 대한 개선의 점이다. 이제 두 아이(미소와 아름)는 우리에게 변화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제 그 열매를 맺도록 어른들이 대답할 때이다. 누구도 사과는 안 했어도 답은 해야만 한다. 무능은 했어도 비겁은 하지 말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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