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가지 설 존재… 유년기 청주 성장설 가장 유력

편집자

중부매일은 '청주의 역사 사건과 인물'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연재는 조혁연 대기자의 깊이 있는 역사 분석과 필체가 결합, 격주로 독자 곁을 찾게 된다. 지면에는 역사 문헌의 원문, 관련 사진, 역사용어 해설 등을 함께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궁예의 태봉국 철원도성 모형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2세기가 흐르면서 곳곳에서 '공민'(公民☞)의 초적(草賊☞)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 영향으로 미륵불의 강림을 자처하는 인물도 나타났다. 기독교로 치면 메시아(Messiah)다. 후삼국 시대 군주인 궁예(弓裔,857~918)도 도탄에 빠진 민중의 삶을 구하고자 등장한 자칭 메시아의 한 명이었다.

"선종(善宗)이 미륵불을 자칭하였다.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다. (중략) 외출하면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다."-<『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

청주인호 1천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도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50 열전 궁예 
청주인호 1천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도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50 열전 궁예 

'선종'은 궁예의 승려시절 이름이다. 궁예는 896년(진성여왕 10)에 처음으로 철원을 도읍지로 삼았고, 2년 뒤인 898년에는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로부터 7년 후인 905년(효공왕 9)에 다시 철원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궁예는 그 과정에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901)-마진(摩震, 904)-태봉(泰封, 911)으로 바꿨다.

궁예는 처음에는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구려(편의상 후고구려)로 정했으나, 한반도 전역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의미에서 마진으로 개명했다. 마진은 '마하진단'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태봉은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에서 천하 만물이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태'(泰)와 봉토를 뜻하는 '봉(封)'의 합성어다.

▷왜 천도를 자주했을까

그가 천도를 자주 한 것에 대해 역사학계에는 미륵신앙 관련설, 왕건의 패서(浿西☞) 지역 결별설, 신라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려 했다는 설, 철원 평야에 대한 기대설 등이 존재한다.

905년 궁예가 다시 철원으로 돌아와 새로운 도읍지를 정한 곳은 처음 지역이 아니었다. 그는 사전에 도읍 후보지를 답사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한 끝에 지금의 철원 풍천원(비무장지대 안) 언덕에 태봉국 '철원도성'을 축조하였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철원도성은 궁성, 내성, 외성으로 구획돼 있다. 내성 북벽과 외성 북벽이 공유하고 있는 상태지만 궁성을 중심으로 '회(回)'자형의 3중 성곽이다. 궁성, 내성, 외성 모두 짧은 시기이지만 시차를 두고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원도성의 규모는 궁성 1.8㎞, 내성 7.7㎞, 외성 12.5㎞ 정도로 외성의 규모에 비하여 내성의 규모가 큰 편이다.

▷'淸州人戶' 1천을 이주시키다

904년 궁예의 행적과 관련해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쟁을 낳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궁예는 철원도성을 완공하기 1년전 '청주인호 1천'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는 이 부분을 "청주의 인호(人戶) 1천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서울을 삼고, 상주 등 30여 주현을 공취하니, 공주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라고 기술했다.

역사학자들은 '청주인호 1천'이 철원도성을 축조하는데 중심적인 인력이 됐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사역이 급히 필요할 때 후방의 인력을 차출하는 사례는 우리 역사에 간혹 등장한다. 신라는 486년(소지마립간 8) 충북 보은 삼년산성을 개축할 때 일선(一善☞)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한 바 있다.

'청주인호 1천'에 대해서는 전문사들 사이에 戶 1천 가구로 보는 견해, 1호당 10명으로 평균한 1만명으로 보는 시각, 단순히 1천명으로 파악하는 견해 등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전국 여러 지역 중에서 왜 하필 '청주인호 1천'을 징발, 사역시켰을까?

▷유년기를 청주에서 보냈을 가능성

역사학계는 궁예가 '청주인호 1천'을 이주시킨 것과 관련해 청주인구 관련설 등 대략 다섯 가지 설이 제기하고 있다.

⑤설은 신호철(전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지론으로, 궁예와 청주의 지리적 연고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는 논문에서 "궁예는 태어나면서 중앙의 정쟁 때문에 지방에서 숨어살게 되는데, 그곳이 청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청주와의 이 같은 연고성 때문에 청주인호 일천을 철원으로 옮겨 축성을 하고 군사적 기반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그런 면에서 청주지역을 궁예 세력의 온상과 같은 곳이라고 한 지적은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탁견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 영조 20년(1744) 승장 영휴(靈休)가 상당산성 축성과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 내용도 거론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사적기는 '궁예가 양길을 섬기고 있으면서 청주를 경략하고 이곳에 상당산성을 축성하고 도읍을 삼으니 따르는 무리가 점차 많아졌다'(往見梁吉 吉分兵東略地 因築成于此都居之 衆漸多)라고 적었다.

왕건, 청주를 직접 방문해 위무를 하고 성을 쌓다 -고려시절요 태조 2년8월 
왕건, 청주를 직접 방문해 위무를 하고 성을 쌓다 -고려시절요 태조 2년8월 

918년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았던 궁예는 왕건 등 부하들에 의해 폐위됐고, 달아나다 죽음을 맞았다. 그해 왕건은 왕으로 추대돼 '고려' 건국을 선포했다. 반궁예파의 도시 청주는 왕건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청주가 몹시 거슬렸는지 능달(能達)·명길(明吉)·문식(文植) 등에게 청주지역 여론 탐지를 지시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홍유(홍유)와 유금필(庾黔弼) 군대를 청주 북쪽의 진천지역에 주둔시켰다. 919년 왕건은 반왕건 분위기가 잦아들자 몸소 청주 순행에 나섰고 성도 쌓았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했다.

"가을 8월. 청주에 행차하였다. 당시에 청주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서 허황된 소문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직접 가서 위무하고 성을 쌓은 후에 돌아왔다."(秋八月. 幸靑州. 時, 靑州反側, 訛言屢興, 親往慰撫而城之, 乃還.)-<『고려사절요』 태조2년 8월>

신호철은 이와 관련 "지명 진천에 '진압할 鎭' 자가 들어간 것은 궁예 반란군이 주둔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청주가 고려 태조 때 '물맑을 淸'자의 지금 지명을 얻은 것은 반란의 혼탁함이 사라졌음이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주를 '물고을'로 인식하고 있으나, 무심천이 건천에 가까운 것에서 보듯 청주는 물이 풍부한 고장은 아니다.

▷철원도성을 주목할 또 다른 이유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방치돼 있는 궁예의 철원도성은 우리나라 금속활자 문화와 관련해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꾼 후 중앙에 광평성(廣評省)을 포함한 19개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다. 이 가운데 10번째 관부가 금서성(禁書省)이다. 역사가들은 후대의 기록으로 보아 금서성이 주조, 즉 금속활자로 각종 전적을 발행한 기관으로 보고 있다.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경적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 때에는 금서성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 3년에 별도로 주자소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2월 병술>

'청주인호 1천'이 철원에 이주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금서성 금속활자 제작을 직접 담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공민: 부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닌 양민을 말한다.

☞초적: 달리 유랑민이라고 한다.

☞패서: 지금의 예성강 서쪽의 황해도를 일컫는다.

☞일선: 경북 구미 지역의 옛 지명이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 사학과 박사)

 

청주문화도시조성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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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다시찾은 보물'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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