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경 일대 4개 촌락 장정들, 나당전쟁 때 징집 다수 희생된 듯

신라장적 4개 촌락 하나인 '西原京 O椒子村'으로 추정되는 초정약수 일대 모습. 드론 촬영.
신라장적 4개 촌락 하나인 '西原京 O椒子村'으로 추정되는 초정약수 일대 모습. 드론 촬영.

신라장적에는 '當縣 沙害漸村(당현 사해점촌)', '當縣 薩下知村(당현 살하지촌)', 그리고 중간자가 탈락한 '○○○村', '西原京 ○椒子村(서원경 ○초자촌) 등 4개 촌락명이 등장한다. 학자들 사이에 신라장적이 지금의 청주인 서원경과 그 주변 3개 촌락의 호구를 조사한 고문서라는데 이견은 없다. 4개 지명과 관련 이인철(전 한남대학교 교수)은 '西原京 ○椒子村'의 구체적인 위치를 '椒'자가 보이는 점을 들어 지금의 청주시 내수읍 초정약수 일대로 특정했다.

신라장적에는 작성 시기를 알리는 간지로 '을미년'이 등장한다. 통일신라 시기의 60년 터울 을미년은 695년(효소왕 4), 755년(경덕왕 14), 815년(헌덕왕 7), 875년(헌강왕 1) 등이다. 전문가들은 처음에는 당시 생활환경 등을 종합, 815년을 신라장적의 유력한 작성 시기로 봤다. 현재는 695년에 작성됐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 결정적 근거는 의외로 신라장적에 자주 등장하는 한자 '烟'자였다.

'烟'자는 굴뚝 연기를 의미하는 한자로, 삼한시대(초기철기)부터 집을 세는 단위로 사용했다. 우리 역사에서 초가삼간은 가장 일반화된 민가로, 집 구조와 규모상 굴뚝은 거의 하나만 설치됐다. 중국은 집을 세는 단위를 '戶'자를 사용했지만,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성덕왕이 722년 정전제(丁田制)를 실시하기 전까지 '烟'자를 사용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단양 적성비에도 이런 '烟'자가 많이 등장한다.

◆신라장적에도 과표와 세율 개념이 존재했다

당시 4개 촌락의 주민들이 경작하던 전체 농경지는 밭316결, 논은 266결 규모였다. 결부제(結負制)는 토지면적과 수확량을 함께 계산한 것으로, '마지기' 개념과 같다. 과거 충북에서는 1마지기를 2백 평이라고 했으나 척박한 강원도는 3백 평이었다. 그래야 수확량이 같다는 의미다. 1결은 대체로 3천 평 안팎이었다.

신라장적 1, 2면. '西原京 O椒子村'(사각형) 글자가 보인다.
신라장적 1, 2면. '西原京 O椒子村'(사각형) 글자가 보인다.

통일신라는 이런 토지를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상상연, 상중연, 상하연, 중상연, 중중연, 중하연, 하상연, 하중연, 하하연 등 9등급으로 분류했다. 9등급은 오늘날로 치면 과표에 해당한다.

그리고 9등급마다 각기 다른 세율을 적용해 이른바 '計烟'(계연)을 추출했다. 상상연에는 9/6, 상중연에는 8/6. 상하연에는 7/6, 중상연에는 6/6, 중중연에는 5/6, 중하연에는 4/6, 하상연에는 3/6, 하중연에는 2/6, 하하연에는 1/6의 세율을 적용했다. 계연수치를 추출하는 공식은 지금과 같은 '과표×세율=세액'이었다. 아직 이견이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세액을 '계연'이라고 불렀다.

당시 촌주가 지금의 초정약수 일대로 추정되는 '西原京 ○椒子村'을 조사한 결과, 하중연 1개와 하하연 9개로 파악됐다. 9등급 중 8, 9에 해당하는 등급으로, 촌락이 전체적으로 가난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조정은 이렇게 얻은 계연수치를 각각의 촌락에 적용해 조(租·농토세), 용(庸·군요역), 조(調·특산물품)를 수취했다.

◆성인 남자 인구가 여자보다 크게 적었던 배경은

서원경 일대 4개 촌락의 695년 총인구는 462명으로 3년 전인 692년 486명과 비교해 24명이 감소했다. 60대 이상은 단 2명으로 단명했다. 성비는 남자 204명(44%), 여자 258명(56%)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54명이나 많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여자가 무려 12%나 많았다.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인구.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인구.

이영훈(전 서울대학교 교수)은 그 배경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전쟁(670~676)에서 찾았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를 무너트린 신라와 당나라는 7년 동안 지금의 경기도 지역과 금강하구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쌍방간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끝에 신라가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이영훈은 이때 서원경 일대의 4개 촌락 장정들도 징집을 당했고, 치열한 전투 속에서 다수가 희생된 것으로 해석했다.

15세 이하의 남녀 성비는 정상에 가까웠다. 서원경 ○椒子村은 남자 27명, 여자 24명으로 되레 남자가 많았다. 청주일대 4개 촌락의 이들 연령층은 나당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세대들로,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됐다. 서원경 4개 촌락의 노비는 총 25명으로 전체인구의 5.4% 정도였다. 아직은 노비가 많지 않았다.

◆비단과 베, 공동 길쌈을 하다

당시 촌주는 뽕나무, 유실수(잣, 가래나무) 등도 조사했다. 가래나무는 호두나무를 말한다. 조용조 가운데 '調'(조)를 수취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4개 촌락에는 총 4천2백49그루의 뽕나무가 심겨 있었다. 이 규모의 뽕나무 밭은 자연 식생을 넘어 과원(果園)처럼 인위적 영농을 의미한다.

서원경 일대 사람들이 촌락별로 뽕나무를 공동으로 키운 것은 비단 옷감을 만들어 경주 왕실에 공물로 바쳤다. 촌락별로 옷감을 만들었다는 것은 촌민들이 공동 길쌈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복의 밑감이 되는 옷감은 길이가 길어야 이불, 저고리, 바지 등을 원하는 대로 재단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인들은 촌락별 공동 길쌈을 '가배'(嘉俳)라고 불렀고, 이것은 가뵈-가외-가위 순으로 변하면서 '한가위'(추석)의 어원이 됐다.

총 4결 가량의 마전(麻田)도 공동으로 경작했다. 촌락민들은 수확한 마를 가지고 베를 공동으로 만들었고, 역시 이를 경주 왕실에 공납했다.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소와 말.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소와 말.

4개 촌락 주민들은 소와 말도 많이 사육했다. 소는 총 53마리, 말은 총 61마리를 사육했다. 통일신라시대는 축력(畜力)을 이용한 농법이 더욱 발달했다. 촌락민들은 여전히 휴한농업(☞)을 했으나, 소를 이용해 깊이갈이를 했다. 말 사육 수가 의외로 많은 것은 나라의 요구에 의해 군마(軍馬)를 많이 길렀기 때문으로 해석됐다. 지면 관계상 신라장적의 촌락별 인구, 농토, 소말, 유실수 등의 구체적인 수치 내용은 <그래프>로 대신한다.



◆ 안정과 번영의 기운이 솟아오르다

이상에서 보듯 1300년전 작성된 신라장적을 통해 당시 청주일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흐릿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조용조라는 국가 행정력에 포섭돼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해야 했고, 군역과 요역 등 노동력 징발도 피할 수 없었다. 비단, 베, 잣, 호두 등 지역 특산물품도 촌주가 촌락 단위로 조사한 과표와 세율대로 어김없이 중앙 정부에 바쳐야 했다. 그들은 부뚜막과 온돌을 갖춘 초가삼간에서 의식주 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편이었고, 수명은 60살을 넘기가 힘들었다.

7세기 무렵은 퇴비법이 발달하지 않으면서 연작상경(☞)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한 해 거른 농토를 축력과 쟁기를 이용해 깊이갈이를 했다. 그들은 말도 많이 사육했지만 자기 소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요구에 따른 대리 사육이었다.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농토.
신라장적의 청주일대 농토.

당시 청주 일대의 장정(16~57세 남성)들은 나당전쟁 때 많이 징집돼 성비가 44%대 56%가 될 정도로 많이 희생됐다. 그후 태어난 세대는 정상적인 남녀 성비를 회복했고, 1300년 전의 청주지역 먼동으로는 서서히 안정과 번영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신라장적은

1933년 일본 황실의 수장고인 정창원(正倉院)에서 한자와 숫자가 가득 적힌 이상한 고문서가 화엄경전 두루마기 속에서 발견됐다. 정밀 조사를 한 결과, 고문서는 통일신라시대 서원경(현 청주)과 그 주변 3개 촌락의 3년간 인구 동태와 가축 사육, 그리고 과실수 현황 등을 기록한 것이었다.

신라장적에 많이 등장하는 烟자는 신라장적을 해석하는 열쇳말이다.
신라장적에 많이 등장하는 烟자는 신라장적을 해석하는 열쇳말이다.

고문서는 당시 한반도에서 화엄경전이 일본으로 전래될 때, 그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포장지였다. 즉 재활용 종이였다. 2매의 고문서는 가로 58㎝, 세로 29.6㎝의 크기로, 닥종이였다. 신라장적(혹은 신라민정문서)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일본학자 노무라 타다오(野村忠夫)이다. 그는 1953년 '신라민정문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신라장적은 이후 각종 한국사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고 있다.
 

☞기벌포: 지금의 군산 앞바다 일대를 지칭.

☞휴한농법: 지력(地力) 회복을 위해 한 해 걸러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

☞연작상경: 퇴비법 발달로 매년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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