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가문의 대 이어 '육가시조' 창작·전승… '옥화구곡' 설정

조강(趙綱, 1527∼1599)의 문집인 『모계집(慕溪集)』은 박훈, 한충, 송인수, 조강, 정사호, 이득윤, 이덕수, 홍석기 등을 낭성팔현(琅城八賢)으로 지목했다. '낭성'은 청주의 별호이고, '팔현'은 조선중기 청주지역의 지(知덕)와 인(仁)을 겸비한 8명의 사림파 유학자를 일컫는다.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16~17세기 청주지역 지성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초정약수를 방문한 세종대왕이 청주향교에 각종 유교경전을 하사하면서 청주지역에 문풍(文風)이 일어났다.

서계 이득윤(1553~1630) 연보
서계 이득윤(1553~1630) 연보


이득윤은 그 문풍을 이어받아 청주지역 선비문화의 바탕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남긴 생전 흔적은 △대를 이은 청주지역 육가(六歌) 전승 △거문고에 대한 이론 정리 △옥화구곡 설정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가학(家學)으로 전래된 청주지역의 경주이씨 육가

성리학과 동반해 고려 후기에 출현한 시조(時調)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정형시로, 그 형식에 따라 평시조, 사설시조, 연시조 등으로 구분된다. 평시조는 초·중·종장 3장으로 구성된 것, 사설시조는 3장중 초·중장이 긴 것, 연시조는 평시조를 확장한 것을 말한다. 이중 6수로 된 연시조를 '육가'(六歌)라고 한다.

경주이씨 이공린(李公麟, 1437~1509)은 박팽년의 사위다. 그는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외가(남양홍씨)의 세거지인 청주 미원면 가양리로 퇴거했다. 그는 8명의 아들을 뒀고 특이하게 거북, 자라 등 물고기와 관련된 이름으로 작명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문장을 잘해 '팔별'로 불리고 있다. 그중 셋째가 이원(李?), 다섯째가 이별(李鼈, ?~?), 막내가 이곤(李鯤)이다.

이공린은 '팔별'로 불리는 8명의 아들을 뒀다. 비를 8마리의 거북이 둘러싸고 있다. 드론 촬영.
이공린은 '팔별'로 불리는 8명의 아들을 뒀다. 비를 8마리의 거북이 둘러싸고 있다. 드론 촬영.

이별의 셋째형 이원이 무오사화(1498, ☞)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유배돼 갑자사화 때 처형됐다. 그는 충격을 받고 황해도 평산의 옥계산에 은거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인 '장육당육가'(藏六堂六歌)를 지었다. '장육당'은 거북이 등껍질 밑에 머리와 다리를 감추고 있듯이, 자신도 속세를 등지고 은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거북의 등껍질은 육각형이다.

장육당육가는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그의 후손 이광윤(李光胤 1564-1637)이 한문으로 번역한 '번장육당육가졸제(飜藏六堂六歌拙製)' 4수가 현존한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이별의 '장육당육가'가를 2배 늘린, 12수의 연시조를 만들었다. 국어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다. 이별의 친조카 중에 이정(李淨,1520-1575)이 있다. 그는 가학(☞)을 잇는 차원에서 장육당육가와 시적 분위기가 비슷한 '풍계육가(風溪六歌)'를 지었다.

풍계육가는 원문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편의상 일부를 현대문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풍(淸風)을 좋이 여겨 창을 아니 닫았노라 / 명월(明月)을 좋이 여겨 잠을 아니 들었노라 / 옛사람 이 두 가지 두고 어디 혼자 갔노.'-<『섬계공유사』>

이곤의 아들 중에 이잠(李潛, 1528~1575)이 있다. 그는 미원 가양리에 거주하면서 청주지역 최초일 수 있는 섬계서당(剡溪書堂)을 짓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이 이번 글의 주인공인 서계 이득윤이다.

그는 아버지 이잠이 사망하자 주역 탐구와 함께 후진 양성에 나섰다. 청주 주성 출신의 이덕수(李德洙), 초평의 이시발(李時發), 『동국지리지』 저자이면서 청주한씨 시조단비를 세운 한백겸(韓百謙) 등은 모두 이득윤의 문인(제자)이다.

이제현의 영당을 모신 수락영당(미원면 가양리)이다. 영당 뒷산에 이득윤의 묘가 위치한다. 드론 촬영.
이제현의 영당을 모신 수락영당(미원면 가양리)이다. 영당 뒷산에 이득윤의 묘가 위치한다. 드론 촬영.

1597년(45세) 이득윤은 모친상을 당한 후 태어난 지금의 북일면 석화리에서 미원 가양리 서계(西溪)로 거처를 옮겼다. 서계는 현 수락영당(☞) 앞의 시냇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그의 호가 되었다.

그도 경주이씨 가문의 대를 이어 육가 창작에 나섰다. 이득윤은 가양리 서계에서는 '서계육가'(西溪六歌), 10년 후 옥화리로 이주한 후에는 '옥화육가'(玉華六歌)를 지었으나 아쉽게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득윤의 맏아들이 이홍유(李弘有, 1588~1671)다. 그도 대를 이어 '산민육가'(山民六歌) 제목의 육가를 지었다. 6수 중 5수가 전해지고 있다.

청주지역의 경주이씨가 유독 육가 창작에 집념을 보인 것은 가문의 선조 이별이 이를 처음 창작했고, 이를 가학의 방편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주지역은 연시조 육가의 본향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표현은 그래서 성립한다.

경주이씨 육가(六歌) 연보
경주이씨 육가(六歌) 연보

 

거문고에 탐닉하다

1597년(45세) 이득윤은 모친상을 치르고 가양리 선영 옆에 작은 재실을 짓고 그 이름을 완역재(翫易齋)라 하고, 근처 흐르는 시냇물을 '불사천(不舍川)이라고 작명했다. 전자는 주역을 탐구하는 집, 후자는 쉬지 않는 시냇물이라는 뜻이다. 주역을 중단없이 시냇물처럼 배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다.

정자 완역재(翫易齋) 앞의 작은 시냇물은 인경산의 지형 때문에 서쪽(우측)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득윤은 이를 본따 자신의 호를 서계(西溪)로 지었다. 드론 촬영.
정자 완역재(翫易齋) 앞의 작은 시냇물은 인경산의 지형 때문에 서쪽(우측)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득윤은 이를 본따 자신의 호를 서계(西溪)로 지었다. 드론 촬영.

그는 경지에 도달한 주역을 거문고 이론을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의성현감을 마치고 낙향한 그는 거문고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평생의 진퇴는 책상 머리의 주역에 맡기고, 반평생의 회포는 무릎 위의 거문고에 맡겼어라.(중략) 고요한 가운데 거문고 울리니 가난도 즐겁고, 한가한 가운데 역을 즐기니 늙음도 더욱 도타워라.'-<『서계집』>

그는 거문고를 타는 흥취를 '주역은 소리없는 거문고요, 거문고는 바로 소리있는 주역이다' 또는 '펼치면 양이 되고 합하면 음이 되어'(『서계집』)라고 적었다. 거문고를 타면 양이 되고, 타지 않으면 음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거문고에 대한 서계의 이러한 인식은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대의 명인들이 남긴 거문고에 관한 글을 수집·정리하여 엮은 이 책은 거문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는 거문고 첫째줄인 제1현은 문(文), 제2현 신(臣), 제3현 군(君), 제4현 민(民), 제5현 세상만물수화(世上萬物水火), 제6현 무(武)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그는 같은 책에서 거문고를 타지 않아야 할 상황으로 오불탄(五不彈)을 거론했다. 5가지는 ①의관을 갖추지 않았을 때(不衣冠) ②시전(市廛) ③옥(囹圄) ④강풍이 불고 무덥거나 비가 올 때(疾風暑雨) ⑤속된 사람을 대할 때(對俗子) 등이다.

 

옥화에서 '산수지락'을 즐기다

1607년(55세) 이득윤은 미원 옥화동으로 이거를 하고 괴산 청천으로부터 보은 내북면 봉황대에 이르는 박대천 수계에 옥화구곡을 설정했다. 그는 틈나는대로 옥화구곡 일대를 소요하며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겼다.

그의 9대 후손인 이필영(李苾榮, 1853~1930)이 지은 한시 '옥화구곡' 서시에 '하늘이 감춰주고 땅이 비밀로 했던 곳에 옥화구곡이 펼쳐졌는데 / 선조 서계 선생이 노니시며 이미 구곡을 모두 정하셨네'라고 기록했다.

그는 제5곡인 옥화대 정상에 춘풍당(春風堂)과 추월헌(秋月軒, 현재는 추월당)을 세우고 인재 양성과 인격 도야에도 매진했다. '춘풍당'으로 이름지은 것은 봄바람이 만물을 소생시키듯 교육의 덕화를 청주지역에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추월헌'은 인품으로 계속 도야, 맑고 흠이 없는 가을밤의 달을 닮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이득윤이 가을밤의 달을 담고자 해서 세웠던 추월헌(秋月軒)은 옥화대 북쪽 사면의 박대천 벼랑 위에 위치한다. 드론 촬영.
이득윤이 가을밤의 달을 담고자 해서 세웠던 추월헌(秋月軒)은 옥화대 북쪽 사면의 박대천 벼랑 위에 위치한다. 드론 촬영.

그의 문집 『서계집』에는 57수의 한시가 실려있다. 시 대부분은 절파풍(☞)의 그림처럼 자신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담담하게 내면을 관조했다. '밤비 막 걷혀 나뭇잎 아직 촉촉하고 / 골짝의 가을빛 참으로 알록달록. / 뉘에게 화가의 솜씨를 청해서 / 석양 속에 나귀 타고 가는 내 모습 그리게 할까?'-<『서계집』>

이득윤은 말년을 보낸 옥화대 일대를 영면처로 삼고자 했으나 결국에는 마음을 바꿨다. 선영이 있는 미원 가양리로 돌아가 저승에서도 효를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내가 흔백을 장사지낼 곳을 일찍이 옥화에 점지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선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이 차마 하지 못하며, 골육을 비록 저곳에 장사지내도 혼백은 마땅히 여기서 노닐 것이니(하략)'-<『서계선생연보』>

이득윤은 수락영당 뒤쪽의 미원면 가양리 인경산 산록에서 영면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이득윤과 신항서원

조선시대 충청도의 두 번째 서원인 청주 신항서원은 조강, 이득윤, 변경수 등이 중심이 돼 건립했다. 초대원장 변경수에 이어 이득윤이 제8대 신항서원 원장을 역임했다. 1666년 송시열(宋時烈)이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항서원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청주와 연고가 없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원장이 되기 시작했다. 1656년에는 청주 출신이 아닌 목은 이색과 율곡 이이가 추가로 제향 됐고 이득윤의 위패는 귀퉁이로 밀려났다. 일련의 일들은 노론이 호서사림의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에서 발생했다. 그 뒤에 송시열이 위치하고 있었다.

1675년 송시열이 귀양갔다. 소론인 명재 윤증(尹拯, 1629-1712)은 신항서원 제향 순서를 재조정하려 했으나, 경신환국으로 송시열이 복귀하면서 무산되었다. 1685년 송시열은 신항서원에 묘정비를 세워 제향 인물의 순서를 영구히 하고자 하였다.

청주 선비문화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득윤은 이때부터 지역 사림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 용어설명

☞무오사화: 실록 사초가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화로, 달리 '史禍'라고도 칭함.

☞가학: 집안 대대로 전하여 오는 학문 혹은 집안에서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칭.

☞절파풍: 중국 절강성에서 발생한 화풍으로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

☞수락영당: 이제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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