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주역사상과 서약 수학 접목 시도한 '융합적 천재'

최석정 영정(부분). /국립청주박물관
최석정 영정(부분). /국립청주박물관

세계 수학사(數學史)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0~500)로부터 시작된다. 피타고라스는 생전에 '만물의 원리는 숫자에 있다'고 믿었다. 서기전 3세기경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s, ?~?)는 책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피타고라스가 수(數)에 지녔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책은 필사본 형태로 존재한다.

'만물의 원리는 하나(monas)이다. 그리고 하나에서 한정되지 않은 둘이 생긴다. (중략) 하나와 한정되지 않은 둘에서 수(數)들이 생긴다. 또 수들에서는 점(點)들이 생긴다. 점들에서는 선(線)들이, 선들에서는 평면(平面)들이 생긴다. 평면들에서는 입체(立體)들이 생긴다. 이것들에서는 감각이 되는 물체(物體)들이 생긴다. 그리고 감각이 되는 물체들의 원소(元素)들은 넷으로 불, 물, 흙, 공기 등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디오게네스)>
 

조선에는 최석정이 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영의정을 8번 할 정도로 인조~숙종 조정의 정치적 중심에 있었다. 정치 외에 양명학, 문장, 음운, 산학(算學)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명곡(明谷)으로 병조호란 주화파로 유명한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다. 그는 성리학을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 ☞)의 양명학을 더 추구했다.

최석정(1646~1715) 연보


그는 산학 가운데 이른바 '조합수학(Combinatorial Mathematics)' 이론에 조예가 깊어, 『구수략(九數略)』이라는 목판본 책을 남겼다. 이 책에는 세계에서 가장 일찍 발견한 이른바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 일명 9차 직교라틴방진)'가 들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 피타고라스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최석정이 있던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타고라스가 정수(整數, ☞)로 접근을 했다면, 최석정의 주역(周易)의 수로 사물에 접근했다.

17세기 중엽 조선에는 달력의 일종인 시헌력 (時憲曆)과 함께 서양 수학도 들어왔다. 이중에는 중국학자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마테오 리치(☞)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천학초함 (天學初函)』이라는 산학서도 있었다. 책에는 마방진(魔方陣) 이론이 들어 있었고, 최석정은 그 이론에 매료됐다.

마방진의 魔는 마법, 方은 사각형, 陳은 진을 쳤다는 뜻이다. 마방진은 정수 n×n 행렬로서, 이를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고 단 한번만 써 넣어 각 열, 각 행,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은 수가 나오도록 만든 것이다. 각 줄의 합은 3차 마방진은 15, 4 방진은 34, 5방진은 65이다. 구하는 공식은 'n(n제곱+1)'을 2로 나눈 값이다. 이 공식을 적용하면 최석정이 처음 발견한 9차 방진은 810이 된다.

그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질서와 이치를 수(數)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마방진 속의 수가 완전한 대칭으로 배열된 것을 보고, 자연과 인간도 그런 모습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김홍도의 . 대각선 사람수의 합이 공교롭게 12가 된다.
김홍도의 . 대각선 사람수의 합이 공교롭게 12가 된다.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 '씨름'에서도 낮은 단계의 마방진을 읽을 수 있다. '씨름'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방향(↘)의 대각선의 합은 8+2+2로 12이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방향(↙)의 대각선의 합 역시 5+2+5로 12가 된다. 김홍도가 의도적으로 마방진을 추구했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그림 속의 사람들이 적당히 분산·배치 되면서 안정적인 균형과 조화미를 달성하고 있다.

이처럼 마방진은 균형 잡힌 구도를 잡는 원칙을 제공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경우들을 중복되지 않게 배치하는 통계학적 모델도 제공한다. 최석정은 책 『구수략(九數略)』에서 실험한 여러 개의 마방진을 남겼다. 그중 <지수귀문도(地數龜文圖)>와 <구구모수변궁양도(9차 직교라틴방진)>이 가장 유명하다.

'구수략' 에 실린 '구구모수변궁형도' (바깥 테두리 사각형). 9차 방진으로 가로, 세로, 대각선 등 어떤 방식으로 더하든 그 수의 합은 90이 되고, 그 합은 810(90x90)이다. 각각의 작은 사각형(소형 9개)도 그 안에서 어떻게 더해도 같은 숫자가 나오는 또다른 독립된 마방진이 된다.
'구수략' 에 실린 '구구모수변궁형도' (바깥 테두리 사각형). 9차 방진으로 가로, 세로, 대각선 등 어떤 방식으로 더하든 그 수의 합은 90이 되고, 그 합은 810(90x90)이다. 각각의 작은 사각형(소형 9개)도 그 안에서 어떻게 더해도 같은 숫자가 나오는 또다른 독립된 마방진이 된다.

 

'구수략'에 실린 '지수귀문도'. 거북등 모양의 9개 육각형은 어떤 배열을 하고 있던 그 수의 합이 93으로 모두 같다.
'구수략'에 실린 '지수귀문도'. 거북등 모양의 9개 육각형은 어떤 배열을 하고 있던 그 수의 합이 93으로 모두 같다.

 

지수귀문도(地數龜文圖)

지수귀문도는 낙서(落書)를 바탕으로 했다. 기원전 2200년 경 중국의 요순(堯舜) 시대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순(舜) 임금은 하우(夏禹)에게 치수(治水) 정책을 시행할 것을 명했다. 하우가 황하 지류인 낙수(落水) 에서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커다란 거북이 나왔다.

육각형의 거북 등을 자세히 살펴보니 1개에서 9개까지의 점이 배열돼 있었고, 그 중간에 5개의 점이 위치했다. 신기하게도 이들 점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합하면 그 숫자의 합이 모두 15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이 점 문양을 낙수로부터 얻은 하늘의 글이라는 뜻으로 낙서라고 불렀다.

그 거북이 나온 이후 홍수가 그쳤다. 순 임금은 낙서가 세상의 비밀과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아가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이라고 믿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낙서는 3수를 어떻게 덧셈을 해도 그 합이 15가 되는, 일종의 3차 마방진이다.

최석정은 낙서를 독창적으로 확장·발전시켜 9개(3x3) 육각형의 꼭짓점에 놓인 수의 합이 93이 되는 지수귀문도를 만들었다. 즉 거북등처럼 생긴 6각형들은 6개의 꼭지점 숫자를 더한 값은 93으로 모두 같다. 일종의 '육각형 마방진'으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전세계 수학자들은 행렬이 7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7x7=49로, 49개의 육각형으로 조합된 마방진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구구모수변궁양도'(9차 직교라틴방진)

2006년 이전까지도 스위스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직교라틴방진의 첫 발견자로 인정을 받아왔다. 행, 열 각각에 1부터 n 까지의 숫자가 겹치지 않게 배열되어 있는 것, 즉 순열 (permutation)로 이루어진 것을 '라틴방진'이라고 한다. 이 라틴방진 중에서 이러한 배열 두 쌍을 결합시켰을 때에도 겹치는 숫자쌍이 없는 두 쌍의 라틴방진을 '직교라틴방진'이라 한다. 첫 발견자는 앞서 언급한 오일러이다.

오일러는 라틴방진을 연구하다 두 가지 라틴방진을 겹쳐놓았을 때 각 항목이 모두 다른 경우를 생각해내고 이것을 '그레코-라틴방진'이라 명했다. 작명 배경은 그리스어 알파벳, 다른 하나는 라틴어 알파벳으로 이뤄져 있는 두 라틴 방진을 합쳤기 때문이다. 세계 수학계는 그 후 그레코-라틴 방진을 오일러를 기려 '오일러 방진' 이라고도 불러왔다.

그러나 2006년 연세대 전기공학과 송홍엽 교수는 오일러보다 61년 먼저 조선의 최석정이 이미 9차의 직교라틴 방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해 송 교수는 『조합론 디자인 편람(Handbook of Com-binatorial Designs)』이라는 책에 최석정의 <구구모수변궁양도>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최석정은 중국을 거쳐 들어온 마방진을 연구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새로운 마방진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정수의 서양수학이 아닌, 역의 대가였던 그는 주역의 수로 마방진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주역 음양(陰陽)의 조합으로 사상(四象)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두 개의 라틴방진을 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숫자로 도식화한 것이 <구구모수변궁양도>다. 이 마방진은 9행 9열 대각선의 합이 '90'으로 같고, 전체는 810(90x90)이 된다. 9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9개의 작은 셀(cell)이 다시 마방진을 이루는 특이한 구조로, 각각의 합이 같다. 큰 마방진 안에 작은 마방진이 들어있는 모습으로, 그래서 직교라는 말이 붙었다.

 

 

가장 머물고 싶었던 곳은 진천 초평

최석정 묘소. 최명길 묘소의 한 구릉 건너편인 청주시 청원구 북일면 대율리 237-15에 위치한다.
최석정 묘소. 최명길 묘소의 한 구릉 건너편인 청주시 청원구 북일면 대율리 237-15에 위치한다.

최석정은 이상에서 보듯 다방면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으나 야당인 소론계에 속했기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을 대표로 하는 여당 노론계의 견제를 늘 받아야 했다. 그가 그때마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선영과 선조들이 남긴 농토와 임야가 있는 진천 초평이었다.

그의 문집인 『명곡집』에는 초평으로 낙향했을 때 지은 한시가 「초평록」(1691, 46세)에 11수, 「후초평록」(1701, 56세)에 9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90년(숙종 16) 연안부사로 나가 1년 남짓 관직 생활을 하다 이듬해 파직돼 초평으로 낙향했다. 그는 이때 초막을 짓고 우거하며 '양지촌사유감'(陽智村舍有感)'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풍진 세상에 이 몸 얽매여 잠시도 쉬지 못해(形役風塵不暫休) / 지난번엔 남쪽 고을 떠나 또 서쪽 고을로(昨辭南邑又西州). / 도리어 부럽구나, 다른 일 없는 村夫가(無營却羨村家漢) / 오래도록 父兄과 마주하며 늙어가는 것이(長對爺兄到白頭)'-<『초평록』>

최석정은 70세(1715)로 타계해 그토록 갈망하던, 초평 지척인 청주시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에서 영면하고 있다. 할아버지 최명길 묘소에서 한 구릉 떨어진 곳이다. 그의 업적은 사후에 더욱 빛이 나고 있다. <구구모수변궁양도>는 그후 세계 수학학계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아, '9차 직교라틴방진'으로 불려지고 있다. 2013년 최석정은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제정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과학기술부와 대한수학회는 과학과 수학 분야의 발전에 공이 많은 학자에게 2021년부터 매년 '올해의 최석정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3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순지(천문학자), 최석정(수학자), 안동혁(화학공학자) 등 3인을 주제로 '한국의 과학'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생명공학 알고리즘과 반도체칩 개발에도 그의 마방진 원리가 활용되고 있다. 그는 동양의 주역사상과 서양 수학의 결합을 시도한 '융합적 천재'였다. 그는 수(數)가 지닌 질서를 통해 세상의 감추어진 비밀을 캐보려 했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훈민정음도 '주역의 수'로 분석하다

 "한글 만들 수 있는 글자수는 1만여 개" 정확히 예측

'경세정운' 에 실린 '계훈편'이다. 최석정은 당시에 이미 훈민정음이 표현할 수 있는 글자수가 1만자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경세정운' 에 실린 '계훈편'이다. 최석정은 당시에 이미 훈민정음이 표현할 수 있는 글자수가 1만자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그가 사망하자 숙종실록의 수정판인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한 것까지 모두 애를 쓰지 않고 신묘하게 이해하고 터득하여 제법 경륜가(經綸家)로서 스스로를 기약하였다'라고 인물평을 했다. 인용문의 자학은 훈민정음을 일컫는다.

그는 『명곡집』에 실린 「경세정운(經世正韻)」 계훈(稽訓) 편에서 주역의 관점에서 훈민정음 자음과 모음의 분석을 시도했다.

'예악과 문장은 찬란하여 조술할 만하며 선천(先天)에서 어긋나지 않고 널리 만물의 이치를 아셨네. 우리말을 탐구하고, 마침내 대훈(大訓)을 창제하시어 이름을 정음(正音이)라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치고 인도하심이라. 글자 모양은 어떠한고? 전서(篆書)와 주서(?書)에서 형상을 취했네. 글자 수는 어떠한고? 하늘의 28숙(宿)과 나란하네. 환하고 빛나는데다 쓰임을 함께 갖췄네. 성음(聲音)과 율여(律呂, ☞)가 배합되어 글자를 이루었고 종성(終聲)으로 조화시켜, 질서 있게 조직했네. 자수(字數)가 만(萬자)로 불어나니, 본체(體)로부터 쓰임(用)에 이른 것. 닭과 개의 울음소리도 모두를 형용할 수 있고 부녀들과 백성들도 열흘이면 알게 되네.'-<「경세정운」 『명곡집』 >

그는 같은 이름의 책 『경세정운』에서 정성(正聲, 훈민정음 자·모음) 자리에 24개, 중성 자리에 32개, 종성(받침)에 16개가 올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이것을 조합한 12,288(24x32x16) 자를 일단 한글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 글자수로 생각했다. 그는 이중 음가가 없는 768자를 제외한 11,520자를 훈민정음으로 쓸 수 있는 최종적인 문자로 봤다. 이 숫자는 현대 한글이 표현할 수 있는 11,172자와 거의 비슷하다.

 

☞용어 설명

지행합일: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의 사상으로,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아직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명제를 강조.
정수: 양의 정수(1, 2, 3…), 음의 정수(-1, -2, -3…) 및 0으로 이루어진 수의 체계.
마테오 리치: 16세기 중국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
율여: 천지간의 고른 양기와 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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