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침략·입지환경 고려… 5개월 동안 머물며 정책 펼쳐

홍건적(紅巾賊)은 만리장성 이북의 '오랑캐'가 아닌 한족(漢族)이다. 북방민족인 원나라가 그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벌이자, 도피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두 차례 침략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2차 침략 때 고려 수도 개경이 함락됐다. 공민왕은 그해 11월 19일(이하 음력 기준) 남쪽으로 몽진(☞)을 가야 했다. 이때 우리나라 전란사에서 가장 참혹한 광경이 일어났다.
 

사람을 구워먹고 임신부 유방을

'이날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하였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0년 11월 24월>

공민왕은 살얼음 지는 개성을 떠나 그해 12월 15일 복주(福州, 현 안동)에 도착했다.(상세 루트 표참조) 공민왕이 안동을 몽진의 종착지로 선택한 것은 △충북의 동쪽인 백두대간이 자연적인 방어선이 됐고 △내륙이어서 왜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이 남행을 하자 죽령 대원(大院)에 고려의 병사들이 방어선을 치기 위해 집결했다.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 "나(정세운 지칭)는 내일 출정할 것이니, 공은 가서 군사를 검열하시오."라고 하니 유숙이 말하기를, "여러 군사가 이미 죽령(竹嶺)의 대원(大院)에 이르렀소"라고 하였다.'-<『고려사』 열전, 정세운>

'죽령 대원'이 어느 사찰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표>에서 보듯 단양 죽령은 공민왕의 남행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따라서 '대원'은 죽령이 아닌 충주 계립령(현 하늘재)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계립령에는 '미륵대원'이 존재한다.

 

안동을 떠나 청주에 도착하다

청주읍성은 고려시대 세워진 후 위치 변동은 없었다. 원은 청주읍성 북문(현 성안길 북쪽 입구)으로, 그 위에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응제시를 짓도록 한 공북루가 위치했다. 출처: (18세기, 운조루 소장).
청주읍성은 고려시대 세워진 후 위치 변동은 없었다. 원은 청주읍성 북문(현 성안길 북쪽 입구)으로, 그 위에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응제시를 짓도록 한 공북루가 위치했다. 출처: (18세기, 운조루 소장).

정세운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 20만명이 홍건적이 가득 한 개성을 통째로 포위하고 공격, 대승을 거뒀다. 소식을 듣은 공민왕은 1362년 2월 25일 봄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복주를 떠나 그해 8월 20일 청주에 도착했다.(상세 루트 표참조) 공민왕이 청주를 임시수도로 삼은 것은 즉흥이 아닌, 여러 입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수원을 후보지로 꼽았다.

"듣건대 전하께서 수원(水原)으로 행차하여 궁궐을 짓고자 하신다고 합니다. 수원은 협소하고 바닷가에 있어 왜구의 침략이 우려되는 곳이고, 홍건적에게 앞장서서 항복한 곳으로 그곳 인심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주는 전하의 순행에 이미 대비하여 왔고, 또 3도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양곡의 수송에 편리하며 적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1년 6월>

임시수도 청주에서의 공민왕 주요 행적
임시수도 청주에서의 공민왕 주요 행적

공민왕은 청주읍성을 임시수도로 삼으면서 다양한 정책을 전개했다.(세부 내용은 표참조) 그해 8월 공민왕은 청주읍성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환송의식 △대신들의 응제시(☞) 짓기 등의 행사를 가졌다.

공북루의 위치에 대해 종전에는 '무심천변 어디쯤'이라는 견해가 있었으나, 지금은 청주읍성 북문 누대(樓臺)인 것으로 정설이 굳어졌다. 전남 구례 운조루에 남아 있는 <청주읍성도>를 보면, 청주읍성의 아치식 북문에는 누대가 올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공북'에 대해 △청주가 북쪽의 수도 개성을 바라보고 있고 △북극성이 임금을 상징하는 점 등 중의적인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대신들은 20여편의 한시를 지었고 그 시들은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수록, 현존하고 있다.

 

공민왕은 승마 애호가

공민왕은 임시수도에서의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취미인 승마를 자주 즐겼다. 『고려사』에 관련 내용이 8월 8일, 8월 10일, 10월 2일 등 세 차례나 실려 있다. '계유 밤에 왕이 평복 차림으로 길에서 말을 달리는 연습을 하였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1년 10월 2일>.

공민왕 자신이 직접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 중에 <천산대렵도>(14세기 중엽)가 있고, 『고려사』 내용은 이것과 일치한다. 그림은 공민왕이 '승마 애호가'였고, 반원정책 이전에는 원나라 식의 변발(☞)을 했음을 보여준다.

공민왕이 말타는 자신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부분(14세기 중엽).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공민왕이 말타는 자신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부분(14세기 중엽).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그해 10월 4일 공민왕은 『고려실록』을 회수해 엄히 수장(守藏)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보관된 『고려실록』은 1390년 충주읍성 서고로 옮겨졌다. 조선 세종대왕은 충주읍성 『고려실록』을 한양으로 옮겨, 이를 바탕으로 『고려사』를 집필하도록 김종서 등에 명했다.

그해 10월 7일 공민왕은 국왕 호위업무를 양광도 안찰사가 대신 율봉역 찰방이 맡도록 했다. 고려시대 청주에는 22개 역도의 하나인 '충청주도'(☞)가 지나갔고, 그 역의 하나가 율봉역이었다.

공민왕은 청주에서의 임시수도 생활이 길어지자 여러 차례 과거를 실시, 그 합격자 방을 망선루에 붙였다. 이때 훗날 명나라로부터 철령위를 되찾은 박실(朴實, 1337~1403), 문익점(文益漸, 1329~1398) 목화씨를 발아시킨 정천익(鄭天益, ?~?) 등이 청주읍성 과거에 합격했다. 박실은 다음 편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덕흥군 '고려국왕' 임명에 움찔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퇴할 기미를 보이자 기왕후 오빠 기철(奇轍) 형제를 살해하는 등 강력한 반원정책을 실시했다. 원나라는 덕흥군(德興君)을 '고려국왕'(☞)으로 임명하는 등 공민왕 견제에 나섰다.

공민왕은 정책전환 필요성을 느꼈고, 앞선 8월 청주읍성 공북루에서 원나라에 파견하는 사신 환송식을 가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임시수도 청주에서 일시적인 친원정책 선포식을 가진 셈이다.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갖고 온 것도 덕흥군 사건과 관련이 있다. 문익점은 덕흥군 편에 섰다가 귀국하자마자 파직, 고향 경남 산청에서 갖고 온 목화씨를 처음 재배했다. 이때 자신의 씨는 하나도 발아하지 않았고, 장인 정천익에게 나눠준 씨가 싹트면서 우리나라 의복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공민왕의 청주 임시수도 기간에는 홍수와 폭설이 내리는 등 기상이변이 잦았다. '큰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으며, 청주성 안에서는 물이 넘쳐 죽은 뱀이 떠다니고, 달팽이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갔으며, 날씨가 여름과 같았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1년 10월 12일> '청주에 큰 눈이 내렸는데, 평지에 쌓인 깊이가 3척이었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2년 2월 3일>

 

공녀를 보내야 하는 참담함

원나라의 공녀(貢女) 요구는 청주 임시수도 시기에도 이어져, 우리의 어린 소녀를 계속 물설고 낯설은 곳으로 보내야 했다. 이제현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은 이국으로 끌려가기 싫어하는 공녀의 피눈물을 이렇게 적었다. '그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눈이 멀어 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예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고려사』 권109, 열전 제신 이곡>

공민왕의 남행길과 환도길
공민왕의 남행길과 환도길

청주 임시수도의 대신들이 환도를 재촉했다. 1363년 2월 4일. 공민왕은 청주를 떠나 그달 13일 개성으로 환궁했다. 몽진을 떠난지 1년 4개월만으로, 청주읍성에는 5개월 보름 가까이 머물렀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 사학과 박사)

 

☞몽진: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의 피난을 비유.

☞응제시: 임금의 명령으로 짓는 시.

☞변발: 앞 머리털을 밀고 뒤 머리털만 남기고 땋는 머리 매무새.

☞충청주도: 지금의 서울-수원-청주-홍성-비인을 경유하였다.

☞고려국왕: 원나라가 요동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심양을 본거지로 임명한 고려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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