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대 해산 당하자 日에 대항… '박과부 집'서 의병 결의

대한제국기의 청주 진위대 군인들은 1907년 청녕각 건물 뜰에서 일제에 강제 해산당했다.
대한제국기의 청주 진위대 군인들은 1907년 청녕각 건물 뜰에서 일제에 강제 해산당했다.

일제는 고종황제의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 잡아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그 여파로 청주 진위대(鎭衛隊, ☞)도 1907년 8월 4일 현재 청주 북문로 1가에 있는 청녕각(淸寧閣,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앞뜰에서 해산하였다. 오쿠마온보(大雄春峰)는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해산 당시의 모습을 『청주연혁지』에 상세하게 기술했다.

'착검(着劍)과 동시에 청녕각(淸寧閣) 윗쪽에서 진위대 방사가 있는 방향으로 순간적으로 진격해 와서 일제히 총구를 겨누게 되었다. 진위대장은 이에 힘을 얻어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때에 들을 수 있었던 소리는 늠름하였으나 진위대 병사들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두 뺨에 흘러내렸다.'-<『청주연혁지』, 26쪽>

이날 착검을 하고 총구를 겨눈 병사들은 청주 진위대 해산을 위해 대전에서 급파된 일본 군인이었다. 진위대 출신의 해산 군인이면서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으로 청주읍성 북문 근처에 살았던 배창근(裵昌根, 1869~1909)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해산 후 비밀 결사를 갖고 의병운동으로 전환했다.

'배민수 자서전' 에 실린 생전의 배창근 모습.
'배민수 자서전' 에 실린 생전의 배창근 모습.

배창근의 아들 배민수(裵敏洙, 1897~1968)는 1993년 자서전 『Who Shall Enter the Kingdorm of Heaven』(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을 미국에서 영문으로 썼고, 이 자서전은 1999년 『배민수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에서 번역·출간됐다. 번역 자서전에 배창근이 북문로 '박과부 집'에서 비밀결사를 갖는 장면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의 군대를 제멋대로 해산시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생업을 찾는 대신 일본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뜻을 같이 하는 부하들과 함께 청주 북문동 '박과부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아버지를 의병대장으로 하는 결사대가 편성되었다. 대원들의 대부분은 과거 대한제국 군인시절 아버지의 수하에서 일하던 부대원들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상황을 알려주곤 하셨으나 나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결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활약상은 나중에 아버지의 동료였던 한봉수(☞) 씨에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배민수 자서전』, 35쪽>

진위대 해산 이후 배창근이 신앙심을 키웠던 청주제일교회.
진위대 해산 이후 배창근이 신앙심을 키웠던 청주제일교회.

그는 이 무렵 군대 해산으로 직업을 잃으면서 북문로 집을 팔고 청주제일교회 근처의 김웅삼의 집으로 이사,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청주제일교회 설립자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cheiblim Miller, 1866~1937), 즉 민노아(閔老雅) 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로 충북에 처음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수갑찬 채 20km를 끌려가다

1907년 8월 18일 염곽상(鹽藿商, ☞)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은 배창근은 의병 토벌에 나섰다가 일본병사 2명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이들을 진천군 초평면 사방기(四方基, ☞)라는 곳으로 유인·총살했다. 공소 판결문은 배창근 행동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일 전진하는 위의 병정을 뒤따라 피고 배창근과 같이 진천군 초평면 사방기에 이르러, 서쾌준은 예정한 계획에 따라 닭을 잡자는 구실로 병정 1인을 유인하여 이 곳에서 수 정(町) 떨어진 촌락에 가서 틈을 보아 이를 총살하고, 잠시 후에 이곳의 주막 김윤보 집 부근에서 피고 2인과 노영섭·설영천은 나머지 1명의 병정을 결박하여 노영섭이 이를 총살하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373~374쪽>

인용문의 서쾌준과 김윤보는 북문로 '박과부 집'에서 비밀결사를 했던 부하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배창근의 진위대 계급은 하사로, 휘하에 부하를 거느렸다. 배창근은 며칠 안 가 추적해 온 일본 헌병에 의해 청주 남문로 집에서 체포됐다.

'아버지는 불시에 들이닥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끌려가셨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갔지만 아버지는 짐승처럼 줄에 묶인 채 20km가 넘는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 갔지만 너무 어린 탓에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으시고 몇 시간이나 정신없이 흐느꼈다.'-<『배민수 자서전』, 38쪽>

당시 경성에 본부를 둔 한국주차헌병대는 천안·영산포(나주)·평양·함흥·부산·용정촌(간도) 등에 는 지방 분대를 뒀다. 배창근은 천안헌병대를 거쳐 서울 남대문 경찰서로 이감했다. 청주의 가족들은 교형 직전 '일주일 후에 사형이 집행된다. 가족이 원하면 면회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 대화

청주시구개정사업지구도(1912년). 위 원은 배창근 가족이 처음 살았던 곳, 아래는 당시 청주제일교회 위치.
청주시구개정사업지구도(1912년). 위 원은 배창근 가족이 처음 살았던 곳, 아래는 당시 청주제일교회 위치.

배창근의 아내는 남편의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이어받게 하는 의미에서 아들 민수를 서울로 가도록 했다. 배민수는 교회 분들이 만들어준 여비를 손에 쥐고 조치원에서 경부선 열차에 탑승, 아버지가 있는 서울 남대문경찰서 면회실에 도착하였다. 이때 배창근은 41살, 배민수는 12살이었다. 부자간에 '지상에서 가장 슬픈 대화'가 오고 갔다.

'"얘, 민수야. 어린 네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 많았겠구나." 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자 울컥 눈물부터 나왔다. "민수야. 아버지는 며칠 후에 하늘나라로 가게 된단다.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내 아들,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목숨을 내놓고라도 지키겠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똑똑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세 가지란다.'-<『배민수 자서전』, 42-44쪽>

배창근의 마지막 유언은 아들에게 첫째 자신을 돌볼 것, 둘째 나 대신 어머니를 잘 모실 것, 셋째 조국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배창근이 3개의 유언 가운데 가장 길게 말한 것은 세 번째였다. 그는 세 번째 유언에서 지면 관계상 다 실지 못 하지만 기독교, 조국, 예수님, 주권, 천국 등을 유난히 강조했다.

배창근의 사형 집행은 『순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실릴 정도로 당시 정부도 주목했다. 배창근은 1909년 7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형 순국했다. 청주의 배민수 가족은 사형 집행을 한지 며칠 후 서울 서대문교도소로부터 '시신을 가져가 장사지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배민수와 어머니, 그리고 청주의 친척들은 시신을 받아 무학산 자락(지금의 연세대학교 뒤산)에 봉분 없는 무덤을 만들었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식민지 청주 성안길 경제력, 조선인 2: 일본인 8

배창근의 심리를 엿보기 위해 비슷한 시기인 1912년의 청주 본정삼정목(현 북문로1가)의 『토지조사부』(☞)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 35필지 가운데 조선인은 8필지(23%), 일본인은 27필지(77%)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전체 소유면적은 조선인은 703평(18%), 일본인은 3,178평(82%)을 소유했다. 1인 평균 소유면적은 조선인 88평, 일본인은 118평의 값을 나타냈다. 실제 거주를 하지 않는 부재지주는 조선인 1명, 일본인 7명으로 조사됐다. 그에 따른 부재지주의 면적은 조선인 172평(5%), 일본인 900평(23%)으로, 일본인 부재지주가 소유한 토지면적 비율이 4.6배 높았다.

이같은 분석은 일제가 청주 성안길 경제력을 빠르게 잠식했음을 잘 보여준다. 배창근의 살고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본정삼정목 필지수와 전체 소유면적은 대략 2:8 비율이었다. 특히 부재지주와 관련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부재지주 7명이 본정삼정목 일대의 전체 토지 가운에 23%(900평) 가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일대에 부동산 투기 바람이 강하게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기 해산 군인 배창근이 '기독 의병'으로 전환한 데는 청주지역의 이같은 식민지 경제 사정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용어 설명

△ 진위대: 을미개혁으로 창설된 대한제국의 지방군대였으나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에 해산.
△ 염곽상: 마른 미역을 파는 장사치.
△ 사방기: 초평면 영구리 영구물 마을 일대이다. 현재 영구물 마을 일대에는 사방터다리, 사방터들 등의 지명이 현존.
△ 토지조사부: 1912년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후에 만든 토지 관련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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