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 Ⅰ
[특집]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 Ⅰ
  • 중부매일
  • 승인 2019.03.13 1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 충북 대표 인물과 만세운동 특징
정춘수 동상은 3·1운동 후 변절해 민족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 3·1운동을 상징하는 횃불 조형물을 설치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평가되는 거국적·거족적 항일투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 세계 3/4에 달하는 피압박약소민족 가운데 제일 먼저 제국주의 타도의 기치를 내세운 선구적 존재였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27년의 힘겹고 피어린 역사를 지탱하며 독립투쟁을 주도해 왔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역사적 법통으로 천명하고 있는 만큼 100주년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본보는 충북의 3·1운동과 충북 출신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그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를 8회에 연재한다.

괴산만세운동 유적비.

얼마 전 3·1절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충북의 지역 언론들은 앞 다퉈 관련 기획 뉴스를 보도했고, 지자체나 시민단체도 각종 행사를 진행하며 100년 전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나 뉴스와 관심은 충북 최초의 만세시위 장소가 어디이며, 몇 회의 시위가 벌어졌느냐에 맞춰졌다. 이 논의를 유발한 기관은 국사편찬위원회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DB를 구축하며 충북 최초의 만세시위를 3월 15일 진천시위라고 규정하고, 충북에서 84회의 시위가 벌어졌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른 견해였기 때문에 논란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정작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 식민지 강점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올바르게 성찰하고, 3?1운동이 민족사와 세계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되새기는 본질적 접근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이다.

2019년 3월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포장이 수여된 전국의 독립유공자는 1만5천511명이다. 이 가운데 충북 출신은 512명(전국 대비 3.3%)인데, 그 중 193명(38%)이 3·1운동의 공적으로 포상을 받았으니, 가히 3·1운동이 최대의 독립운동임을 통계로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충북에서 맨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 물론 이는 만세시위를 어느 기록에 나타난 얼마만한 규모부터를 기준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가 규정한 3월 15일 진천시위는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계획한 것으로 일제에 의해 '미연 방지'된 것으로 시위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를 충북 최초의 만세시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충북에서 학생들의 움직임은 이미 3월 10일 청주농업학교와 3월 15일 충주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계획됐으나 일제에 사전 탐지돼 시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일제 헌병과 경찰의 보고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2차 사료나 개인의 구술 가운데는 이미 3월 2일이나 7일에 청주에서 시위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 자료와 교차 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인정되지 않고 있다.

충북에서 본격적인 만세시위가 발생한 곳은 3월 19일 괴산장날 벽초 홍명희가 주도한 시위였다. '본격적'이라는 전제를 붙이는 것은 이전에 만세시위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일제 보고기록에 누락된 소규모의 시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북의 만세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학생과 종교조직이 미약하고 철로 변에서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독립선언서 전달 등 정보가 늦은 원인 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후 4월 19일 제천 송학면 시위까지 도내 전역에서 만 1개월 동안 만세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가장 절정을 이룬 시기는 3월말 4월초였는데, 특히 4월 1일과 2일은 도내에서 29회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83회의 시위 중 35%가 이틀 동안에 집중된 것이다. 다만, '최초'니 '최대'니 하는 시위의 선행성이나 규모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강박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의병장 한봉수의 3.1운동 관련 판결문(1919. 5. 6,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국가기록원 소장).

충북지역 만세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격렬성에 있다. 일제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만세시위 현장에서 시위군중과 일본 군경이 충돌하는 '폭력시위'는 전국 평균 37%였다. 그런데 전국에서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출동한 지역은 충북으로, 시위의 70%가 현장에서 충돌을 빚었다. 전국 평균을 거의 두 배나 넘는 격렬성을 보여주는 통계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서 충북에서 44회의 시위가 발생해 일제의 발포로 99명이 순국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6명을 배출한 것도 충북지역 특징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가 그들이다.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 아래에서 스스로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목숨을 내건 숭고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주 3·1공원에 조성된 민족대표 동상 6기 가운데 1기의 동상이 1996년 시민단체에 의해 강제 철거된 것은 역사평가의 엄정함을 보여준다.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의병장이 보통학교 학생들과 만세를 외친 것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광경이다. 4월 2일 의병장 한봉수와 내수보통학교 학생들이 함께 독립세를 부른 세교리 시위가 그것이다. 이는 3·1운동이 의병으로부터 전승되는 주체적 항일투쟁임을 입증하는 실증적 사례다. 곧 3·1운동이 민족자결주의라는 외래적 요인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처럼 폄훼하는 일본 역사왜곡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깨뜨린 사례다.

박걸순 교수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3·1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을 선언한 사실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1776년 7월 4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연방정부가 수립된 것은 13년 뒤의 일이다. 우리는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세웠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이룬 자랑스러운 역사다. 3·1운동의 역사적 용어에 대해 논란이 있다. 3·1운동이란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지적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3·1독립선언'으로, 3·1절은 '3·1독립선언절'로 개칭할 필요가 있다.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이 모두 이름이 있는데, 3·1절만 숫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래야 8·15 광복절이란 이름과도 어우러질 수 있다. /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