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와 만세 함성 - 괴산·청주·진천·충주편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울려 퍼진 충북지역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4월 19일 제천 송학면 시위까지 도내 전역에서 전개됐다. 당시 충북의 행정구역은 10개 군이었다. 도내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는 '괴산·청주·진천·충주' 편과 '옥천·영동·보은·음성·제천·단양' 편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정리한다.

괴산에서는 3월 19일·24일·29일 장날, 만세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 시위는 장날을 이용한 연속시위의 전형을 보인다. 3월 19일 만세시위 주도자는 홍명희(洪命憙)였으며, 그는 이날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서로 몰려가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여 경찰서를 파괴하는 등 이튿날 새벽까지 격렬히 투쟁했다. 이 때 괴산공보 학생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洪性憙)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됐고 29일 장날에도 다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청안은 현(縣) 치소(治所)가 있던 옛 고을이다. 3월 30일의 청안 장날 3천여 명의 장꾼들이 3차에 걸쳐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다가 일제의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는 충북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가운데 가장 많은 군중이 집결한 최대 규모였다. 장연면에서는 4월 1일과 2일에 걸쳐 2백여 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인근의 대성리 뒷산에서 30여명의 동리사람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또한 4월 1일 청천장날 만세시위를 벌이던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했고, 2일에는 소수면 주민들이 면장 집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칠성면에서는 4월 3일 쌍곡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안면 광덕리(현재 증평군)에서 4월 10일 만세시위가 전개됐는데, 일제의 야만적 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청주에서는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발견되고, 3월 10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3월 23일 강내면 태성리에서 조동식을 중심으로 연일 산위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치며 시작됐다. 봉화만세운동은 4월 1일 절정에 달했다. 이날 청주를 비롯해 강외·강내·옥산·오창·부용·북일·북이 등 8개 면의 산 위에서 동시에 봉화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밤에 산위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치는 것은 매우 강렬한 방법으로써 효과가 컸다. 청주는 분지지역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도 사방으로 시계가 트여 한밤중에 산위에서 불이 피어오르면 금새 인근 지역에서 이를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밤에는 소리의 전파 범위가 확대되기 때문에 만세 함성은 바로 이웃 마을에 곧 전달될 수 있었다. 따라서 봉화만세운동은 신속한 파급성으로 인해 인근 지역으로 파급돼 만세시위의 독특한 전형으로 정착하게 됐다.

3월 30일, 군내 최대의 만세운동이 미원장터에서 벌어졌다. 이날은 미원 장날로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헌병주재소에서 헌병이 출동해 주도자를 잡아가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유리창을 부수는 등 격렬히 항쟁하다 일제의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4월 1일과 2일은 내수 세교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1일 밤에는 세교리 인근의 우산리에서도 수십 명의 주민이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인 2일 정오에는 의병장 출신의 한봉수(韓鳳洙)가 세교리 장터에서 이곳에 모인 장꾼과, 마침 이곳을 지나던 내수보통학교 학생과 교사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의병장 출신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한봉수가 나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과 어우러져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것은 3·1운동사에서 특기할 일이다. 또한 4월 2일에는 북이면 신대리에서 식민지 통치기구의 가장 말단 관리인 면서기가 만세시위를 주도함으로써 3·1운동이 신분과 직업 등의 조건을 초월한 거적적인 독립운동이었음을 입증한다. 4월 6일 오후 8시경에는 문의면 산 위에서 1천300여명의 대규모 군중이 봉화를 피워 올리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하사 이하 일본군과 헌병에게 주도자 8명이 피체되기도 했다. 당시 청주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손병희·권병덕·신석구·신홍식·정춘수 등 5인을 배출함으로써 민족대표의 산실로 평가된다.

진천에서는 3월 15일 진천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8명이 피검됐다가 훈계 방면되며 불발로 그쳤다. 그러나 4월 2일에는 군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이월면 장양에서는 200여명의 주민이 헌병주재소를 내습한 바, 헌병들이 공포를 발사하며 무력진압에 나서 해산됐다. 또한 이날 밤 만승면 광혜원에서는 500여명의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한 뒤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를 구타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백곡면 석현에서는 다수의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헌병과 충돌했다. 4월 3일에는 다시 광혜원에서 600여명의 군중이 2차에 걸쳐 봉기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헌병이 응원 출동한 보병과 합세해 발포를 감행, 4명이 순국하고 5명이 부상 당했다.

충주에서도 3월 15일 간이농업학교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충주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으나, 사전에 일경에 탐지돼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계획의 주역은 류자명(柳子明)이었다. 그는 이 계획 실패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망명, 의열투쟁의 이론을 정립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나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필자는 지난 3·1절에 중국 베이징의 대한민국대사관에서 개최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참가했다가 행사장에서 그의 딸 류득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고향 충주에서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유를 설명하기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4월 1일 신니면 신청리 용원 장날, 단경옥과 손승억 등이 주도하는 500여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펼쳤다.

3·1운동 발발 100주년이 경과하며 이제 그 현장을 증언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현장에 건립된 기념비가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세시위 현장에 아무런 표지조차 없는 곳이 많아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믿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 사진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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