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건립, 1948년 정부수립 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 60호에 국내외 각지에서 참가한 대표 29인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가 열린 것이다. 회의는 꼬박 밤을 새워 이튿날인 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계속됐다. 먼저 회의체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정하는 순서가 됐다. 신석우 의원이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동의(動議)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이 있었다. '대한'이란 국호는 조선왕조 말엽에 잠깐 사용하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 보자고 반론을 폈고, 이영근 의원의 제청으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3·1운동 직후 뜨거운 자주독립의 열기가 국내외에서 여럿의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올바로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3·1운동이 어머니가 되어 노령 연해주의 대한인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라는 귀중한 자식을 낳았다. 이들은 조직도 있었고, 법률적 체제도 갖춘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였다.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의 마당로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의 마당로

이외에도 신한민국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임시정부 등도 잇달아 임시정부의 조직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전단정부'라고 불린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이렇게 많은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직을 선언한 것은 그만큼 한민족의 자주독립 열기가 3·1운동으로 용암처럼 분출된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19년 9월, 대한국민의회·한성정부·상하이 임시정부는 통합 논의회 나서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고 상하이에 위치하기로 결정했다. 분산돼 있는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합해 투쟁하자는 의지가 통합을 이뤄낸 것이다.

독립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상하이는 만주나 연해주보다 입지적 조건이 좋지 않았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하이가 통합 임시정부의 장소로 선택된 것은 국제도시로서 접근성이 좋고 외국 조계지가 있어 치외법권이 적용돼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조건 등이 고려된 것이다. 상하이가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명이 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항저우 시기 호변촌 임시정부청사
항저우 시기 호변촌 임시정부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는 정부의 존재 위치에 따라 3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상하이 시기'로 1919년 수립부터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로 항저우로 떠날 때까지의 13년간으로 임시정부의 절반 시기에 해당한다. 

제2기는 '이동시기'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를 거쳐 1939년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당도할 때까지 8년간 중국 남서쪽으로 내륙을 가로지르며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때이다. 

제3기는 '충칭시기'로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해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당·정·군 됐제를 정비하고 조국의 해방을 준비한 시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현재 임시정부가 이동하며 스쳐 지나간 지역에는 임시정부 청사나 요인 거주지 등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전장의 청사는 확인할 수 없고, 치장의 청사는 얼마 전까지 있다가 도시개발로 헐렸다.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던 광저우 청사도 얼만 전 확인했는데,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중국 정부와 복원이 협의 중이다. 나머지 지역의 임시정부 청사는 현지에 잘 복원돼 있다. 현재 전 세계 24개국에서 1천여 군데의 독립운동유적지가 확인된 바, 그 가운데 중국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의 보존과 복원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분단시대에 남북한의 임시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완전히 상반되는 양극상을 보인다. 남한은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오늘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정통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못하나, 그 역사적 권능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영토만 분단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역사마저도 두 동강 난 남북 역사 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인식의 대립은 남북의 문제만은 아니다. 남한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 진영간 양극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대립상은 이른바 '건국절' 논란으로 몇 차례 표출됐고, 재연될 조짐도 있다.

제헌 헌법(1948) 전문에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1948년에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천명했다. 분명히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것이고, 1948년 정부 수립은 대한민국의 '재건'이라고 그 정통성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이승만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제헌 국회 개원식 개원사에서 1919년 임시정부를 '건설'했고, 1948년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했다고 하며, 기미년 서울에서 건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해서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이라고 말했다. 1948년 9월 1일 발행된 '대한민국관보' 창간호는 간기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원년을 1919년으로 기산한 것이다. 건립과 재건립, 건설과 재건설, 계승과 부활이란 용어는 모두 이승만이 직접 1919년의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관계를 명쾌하게 설정해 사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호 논란은 해방 후 제헌 헌법 제정 과정에서 또 한 차례 있었다. 

1948년 6월 7일 실시된 헌법기초위원회의 표결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이 압도적 다수로 국호로 결정됐다. 정파간 권력 장악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개입된 이 국호 논의에서 이승만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밀어 붙였던 결과였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승만은 7월 1일의 제헌헌법안 독회 때 "국호가 잘되지 않아서 독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니 3·1운동에 의해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대로 대한민국으로 정하기로 하고 국호 개정을 위한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헌법 통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당부했다. 

오늘날 입만 열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우며 '국부(國父)'라고 떠받드는 사람들이 정작 이승만의 역사인식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독립운동으로 세우고 일궈온 대한민국이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새로운 100년을 다짐하는 하루가 돼야 할 것이다. / 사진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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