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펼친 독립운동 - 증평 곡산 연씨 연병환 가족

상하이 송경령능원 외국인 묘역에 있는 연병환 묘비(바로 왼쪽이 박은식 묘비이다).<br>
상하이 송경령능원 외국인 묘역에 있는 연병환 묘비(바로 왼쪽이 박은식 묘비이다).

필자가 처음 중국 상하이를 답사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직후로, 이후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다녀왔다. 필자가 교사나 학생 답사단을 인솔하고 상하이를 갈 때, 반드시 들르는 유적지가 있다. 지금은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당시는 만국공묘(萬國公墓)라고 불리던 공동묘지다.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관광객은 전혀 들르지 않는 곳이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이 묻혀 있던 중요한 유적이다. 여기 모셔져 있던 박은식·신규식 등 선열들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모셨으나, 묘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따라서 독립운동 당시의 어려움과 선열들의 민족혼을 설명하기에 좋은 공간이기 때문에 꼭 들러 헌화와 묵념을 올리고 현장 강의를 해왔다.

연병환 유해봉환식(2014. 11. 14)

그런데 2014년 11월 14일, 저녁 뉴스를 보며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십 차례 방문한 만국공묘 박은식 묘비 바로 옆의 묘비명은 'YAN PUNG HAN'으로 돼 있어, 발음상 외국인일 것으로 생각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분이 증평 출신의 독립운동가 연병환으로서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것이다.

연병환과 연병호 생가(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증평의 곡산 연씨 독립운동을 이끈 연병환(延秉煥, 1878~1926, 2008년 대통령표창)은 묘비명이 잘못 기재돼 우여곡절 끝에 확인된 독립운동가였다. 잘못된 묘비명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분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곡산 연씨 일가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에 착수, 그해 12월 19일 증평군청에서 전문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곡산 연씨 일가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2016년에는 그 연구결과를 정리해 '증평 출신 곡산 연씨 일가의 독립운동'이란 책자로 발간했고, 이 연구를 바탕으로 그해 그의 고향인 도안면 석곡리에 항일역사공원과 전시관이 조성됐다. 이로써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연병환의 증평 토지소유 관계를 기록한 광무양안(1901)

연병환은 고향 도안에서 중농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1901년 조사한 토지대장인 '광무양안(光武量案)'을 통해 확인된다. 그는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주요 해관에서 근무하다가 중국으로 전임해 안동을 거쳐 용정세관에 근무했다. 뛰어난 어학 실력과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았다. 당시 중국 관청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봉급을 조사한 일제의 비밀기록에 따르면 그는 동료들보다 10배에 가까운 봉급을 받았음이 확인된다. 그는 이 돈을 북간도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에서 1만여 명의 동포들이 독립축하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펼쳤던 데에는 그의 숨은 지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용정 3·13만세시위 직후 그는 일본 영사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일제는 그의 체포 구실로 집을 수색했더니 커다란 아편 덩어리가 나왔다는 악의적인 발표를 했다. 이 사실은 즉각 일본 언론에도 보도됐다. 그가 곧 상하이 세관으로 전임됐다가 다시 푸저우(福州)의 싼두아오(三都澳)로 옮긴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결과였다.

연병환의 민족운동은 동생, 딸과 사위, 외손녀로 이어지며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동생 연병호는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참여를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중국 대륙을 누비며 방략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계의 혁신을 불러일으킨 선봉으로서 새 시대를 이끌어간 독립운동가였다.

연병호(1894~1963, 1963년 독립장)는 형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조직부터 참여했는데,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자신의 독립운동의 신념과 각오를 밝히는 '독립기념일의 말'(1920년 3월 30일자)을 게재했다. 1922년에는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됐고, 상하이 한인들이 세계한인동맹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그의 집을 통신사무소로 사용했고, 청년회가 설립될 때에는 9인 위원에 선임되는 등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다.

난징에서 활동할 무렵, 그는 한국혁명당과 신한혁명당의 조직에 참여했고, 다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상하이에서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돼 '적색운동의 최고 간부 거두'로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 의원으로서 본회의에서 연호와 관련해 '대한민국 30년'을 사용할 것을 주장, 대한민국의 법통성을 옹호했다.

다른 동생 병주와 병한도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 또한 형 병환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연미당과 엄항섭 결혼식(상하이, 1927. 3. 20)   

한편 그의 딸 연미당(1908~1981, 1990년 애국장, 본명 연충효)은 중국 북간도 롱징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상하이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그녀는 1927년 이동녕의 중매로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비서국으로 김구를 보필하던 청년 엘리트 엄항섭(1898~1962, 1989년 독립장)과 결혼하며 부부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중국한인청년여자동맹원으로 여성계의 통일전선운동에 노력했고, 상하이 지역 한인들의 각 단체를 연합하는데 기여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때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연미당이 만든 보자기로 쌌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을 때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보살폈다. 특히 1937년 김구가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맸을 때 그의 집으로 모셔 정성껏 간호해 회복시켰다. 충칭시기 한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됐을 때는 조직부 주임으로 선임됐으며, 남편과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연병호의 예심종결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7. 11. 7).

연미당과 엄항섭의 딸로 상하이에서 태어난 엄기선(1929~2002, 1993년 건국포장)도 부모를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기선은 1938년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했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부친을 도와 중국 방송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중국인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리고 임시정부를 홍보하는 활동을 펼쳤다.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가족 단위로 망명을 통해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자·부부·형제 독립운동가가 많다. 또한 이들끼리 혼사가 이뤄져 대를 이어 여럿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그런데 연병환의 가족처럼 아우·딸·사위·외손녀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펼친 사례는 매우 드믄 경우로 존경받아 마땅한 독립운동의 명가다. 다만, 아들 연충렬의 의혹의 행적과 죽음, 사위 엄항섭의 납북, 손자들의 중국과 북한 거주는 식민지 지배와 분단, 디아스포라가 빚은 한국근현대사의 굴곡이 드리운 가족사의 어두운 그림자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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