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Ⅱ
[특집]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Ⅱ
  • 중부매일
  • 승인 2019.03.2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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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유·고문에도 당당하게 식민지배 부정하고 독립확신
민족대표 5人 (좌측부터 권동진, 권병덕, 손병희, 신석구, 신흥식)
민족대표 5人 (좌측부터 권동진, 권병덕,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충북은 3·1운동의 초기 단계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6인을 배출했다. 천도교계의 손병희·권동진·권병덕과, 기독교계의 신석구·신홍식·정춘수가 그들인데, 이들을 기리기 위해 청주 3·1공원에 동상이 조성됐다. 이들 중 권동진(괴산으로 알려졌으나, 본적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청주 출신으로서, 1개 군에서 5인의 민족대표를 배출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한 사례이다.

손병희는 천도교 자금을 내어 3·1운동의 준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3대 원칙을 수립하는 등 만세운동을 총괄 지휘했다. 권동진은 오세창, 최린과 함께 만세시위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3인 중 한 사람으로서, 손병희가 만세시위를 결심하도록 추동하고 타 종단과 연합을 추진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권병덕은 손병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주저 없이 참가했고, 신석구·신홍식·정춘수는 기독교 목사로서 우리의 독립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고 서명 날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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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정춘수 수형 기록표.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 직후 민족대표 참석자 전원이 경시청총감부로 연행돼 구금됐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정춘수는 후일 구금됐다. 이들은 경무청총감부와 서대문감옥, 경성지방법원, 고등법원 등에서 일본 경찰과 검사, 판사로부터 수차 신문(訊問)을 당했다. 일제는 이들을 극형에 처하기 위해 '내란죄'를 덮어씌우기에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회유와 때로는 고문을 반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당당하게 법정투쟁을 펼쳐나갔다. 그 결과 이들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손병희와 권동진은 3년, 권병덕·신석구·신홍식은 2년, 정춘수는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확신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은 절대로 일제에 동화될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며, 식민지 시혜론과 근대화론을 펴는 일본 판검사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세계 개조의 신기운이 팽배한 국제정세를 예의 주시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렸다. 천도교측은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천도구국단이나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모색해 오던 중,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을 듣고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했다. 이들은 우리의 독립이 일본에게도 유리한 것이라는 논리로 일제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병희와 권동진은 물론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적용 범위나 한계 등에 대해 다분히 낭만적 기대와 환상 이상의 인식은 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대표들은 동양평화론의 원론적 구조를 상기시키고,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거론하며 일제가 조선을 독립시키도록 추동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이 말한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나, 이토 히로부미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였다. 이들이 지녔던 동양평화론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나,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립으로 보는 동양주의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을 먼저 독립시켜야만 동양의 평화유지가 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방편이었다.

청주시가 상당구 수동의 3.1공원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친일 행적으로 논란을 빚은 정춘수 동상을 철거했다.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정체(政體)로서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 그러나 정춘수의 정체론은 달랐다. 그는 통감부 시대와 같이 일제의 지원을 받는 민족자치를 희망했다. 심지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 보다 낫다는 괴변을 펴며 다른 민족대표나 민중들이 지녔던 정체론과는 완전히 괴리된 답변을 함으로써 스스로 민족운동 대열에서의 이탈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들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독립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는' 마음으로 파종론을 전개했다. 이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뿌린 자주독립정신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싹을 틔웠고 1920년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으로 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종교 계몽주의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들은 일본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는 한말 이래 지성이 지녔던 일본관의 한계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나, 일제의 침략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종교를 우선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그들은 민중을 역사 변혁의 주체로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민중불신론을 보인다. 손병희 등이 '우매한 자'들의 소동을 우려해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고, '유시문(諭示文)'을 통해 경거폭동을 금지케 한 것도 종교 계몽주의자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민중과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리고 완전히 단절됐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왜냐하면 일부 민족대표들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준비하거나 지도하는 경우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특히 손병희가 한봉수와 홍명희를 통해 청주와 괴산의 만세운동을 지시해 실제로 만세시위로 연결됐다는 사실은 이들이 지닌 한계와는 별도로 평가돼야 할 것이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의 재판판결.

얼마 전 역사 '스타 강사' 설민석이 민족대표를 폄훼하는 강의를 했다고 하여 고소당한 바 있다. 작년 11월 1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5부는 설민석에게 민족대표 후손들에게 1천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가 강의 중 "민족대표 대부분이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고 발언한 부분을 허위로 판단한 결과로서, 모욕적 언사로써 민족대표를 필요 이상으로 경멸·비하·조롱한 대목에 대해 정신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시한 것이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이 사건과 판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민족대표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양극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도 매우 냉담하고 비판적이다. 물론 그들의 인식과 행동에는 분명히 지적될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일부 인사들이 3·1운동 이후 '민족대표'라는 이름을 지키지 못하고 친일의 길로 변절한 것은 엄정하게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시기에 '민족대표'로 서명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한 조각 폭탄의 파편이 되어 일제의 심장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으나,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폭탄의 뇌관에 점화해 폭탄이 터지도록 한 공적까지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 사진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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