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 Ⅳ
박걸순의 충북 독립운동사 다시보기 Ⅳ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9.04.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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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와 만세 함성 - 옥천·영동·보은·음성·제천·단양편

3월 27일은 옥천 이원장날이었다. 이날 6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이원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내부로 들어가 유치장과 벽을 파괴하는 등 격렬히 항쟁했다. 이날 만세시위는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가했다가 귀향한 허상구·육창문·육창주 등 허씨와 육씨 일가의 참여와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장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는데, 이때 일제가 출동해 허상기·육창주·김용이 등을 헌병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투석전을 전개하며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격렬히 항쟁했다. 이 때 옥천헌병분대장 등이 응원 출동했으나, 오히려 10명의 헌병이 부상할 정도로 시위 군중의 기세가 등등했다. 이에 일제는 다시 대전으로부터 장교 이하 21명의 수비대를 파견, 사격을 감행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이원 시위를 충북 '폭행 소요의 효시'라고 보고했다. 또한 이 사건이 신문에 곧 보도됨으로써, 도민 전체에 '두드러지게 소요 기분을 환기'시켰으며, 이로부터 각 지역에서 자주 시위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일제가 이원시위를 주목한 것은 헌병 측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범우 등 제천시위 주동자의 재판판결문(1919. 4. 29,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국가기록원 소장)

청산에서도 잇달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6일 읍내에서 수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2일 밤, 3백여 명이 장터에서 전개한 시위는 곧 해산됐으나, 이튿날에는 1천여 명의 군중이 청산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제가 무차별 발포를 감행해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만세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청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5, 6호는 온 가족이 주재소 안으로 피신해 있을 정도로 시위는 격렬히 전개됐다. 시위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주재소 마당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한편 4월 8일 밤에는 군서면 오동 헌병주재소 관내에서 약 50여 명의 주민이 횃불을 피우며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했으나 헌병이 출동하자 곧 해산했다.

영동에서는 3월 30일 학산면 서산(鋤山) 경찰관 주재소에서 2백여 명의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안으로 들이닥쳐 유리창과 전화를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곳에서는 다시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300여명의 군중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하며 시위를 벌이자 일제가 무차별 사격을 감행,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4월 3일 학산면사무소에서 양봉식이 주도해 뽕나무 묘목을 불태워버리며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에 저항한 시위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한 구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충청북도장관이 내무주장관에게 발포로 사상자 발생을 보고한 옥천 이원시위 상황 전보(1919. 3. 27)

4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매곡면 노천리와 옥전리 일대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어 군중은 인근의 추풍령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전후 7회의 시위를 벌였다. 4월 5일에는 매곡면 추풍령 헌병분견소 건물이 불탔는데, 일제는 이를 '폭민'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보고했다. 6일 오전 11시에는 6백여 명의 주민이 다시 분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곧 해산 당했다.

4월 3일에는 양강면 괴목리에서 2천여 명의 군중이 봉기해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했는데, 일제는 인근에서 경찰 5명을 응원 출동시켜 해산시켰다. 4월 4일에는 영동읍에서 2천여 명의 대규모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헌병이 응원 출동해 경찰과 함께 사격을 감행해 6명이 순국하고 8명이 다쳤다.

음성에서는 4월 1일 소이면 한내 장날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했다. 2일 밤에는 삼성면 천평리에서 5백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경찰 주재소로 들이닥쳤고, 주천·내송·쌍정리 등지에서도 시위가 계속됐다. 4월 6일 밤 9시경에는 음성읍 고지에서 5백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자 보병과 경찰이 협력해 군중을 해산시켰다. 4월 11일 밤에는 원남면 주봉리에서 80여 명이 소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곧 해산 당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운동 기록인 '한일관계사료집'과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우리 측 자료에는 보은의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일제측 자료에는 분명히 보은시위가 기록돼 있다. 

4월 초순에 들며 인근의 옥천과 영동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자 보은에서도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대전으로부터 장교 이하 16명을 파견해 삼엄한 감시를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4월 8일 보은 소재지에서 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산외면 구티리에서 100여 명이 종을 울리며 만세운동을 시작하다가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해 해산 당했다. 4월 12일 밤에는 수한면 무서리에서 주민 100여 명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을 벌였고, 13일 밤 11시에는 삼승면 선곡리 이민 30여명이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제천에서는 4월 17일의 제천 장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장터에서 미리 제작·배포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범우는 권종필, 이기하 등과 함께 전날 제천공보 졸업생들의 만세시위가 무산된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이날 오후 6시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4월 18일에는 송학면사무소 앞뜰에 최종률 등 70여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이튿날 오전 1시경 면장 사택으로 몰려가 면장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의해 해산됐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3·1운동 DB에 단양에서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3월 4일부터 3일 동안 단양읍내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회고담이 전한다. 또한 3월 20일 오후 8시경 군내 각 처에서 봉화시위를 벌인 후 해산했으며, 4월 6일 단양에서 시위가 있었다고 전하나, 이 또한 일제 보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 충북 전역에서는 장터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밤마다 봉화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충북의 3·1운동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기 그지없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공모사업에 청산 3·1독립만세공원 조성사업 등이 선정돼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나, 충북의 기념(현충)시설은 타 지역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경제논리가 현실적 판단을 결정짓는 중요 요소이나, 근대의 정신문화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자산이 결코 경제의 하위개념은 아니다. / 사진은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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