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인들에게 최적의 환경 제공해준 삶의 터전이자 보금자리
'미호강의 말 없는 역사' 고고학적 기록 통해 면면히 밝혀져

[중부매일 김성식 환경생태전문기자] 문자 이전의 선사시대는 오로지 유구와 유물, 동·식물유체 등의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미호강을 터전으로 삼았던 선사인들의 삶은 어떠했고 당시 자연환경은 어떠했을 까라는 의문도 마찬가지다. 미호강과 관련된 '말 없는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각종 고고학적 기록들이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속속 찾아지고 있는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다.
 

구석기인의 터전으로 중요 역할

충북대학교박물관이 재현한 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소. 미호강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인 청주 만수리 유적의 경우 3문화층에서 211점의 몸돌과 390점의 격지가 출토돼 다양한 석기 제작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김성식 
충북대학교박물관이 재현한 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소. 미호강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인 청주 만수리 유적의 경우 3문화층에서 211점의 몸돌과 390점의 격지가 출토돼 다양한 석기 제작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김성식 

지금까지 찾아진 청주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모두 4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미호강의 품 안에 자리한 이들 구석기 유적은 미호강, 나아가 청주지역이 구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당시에는 수렵, 어로, 채집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그만큼 그 당시에는 이 일대의 자연환경이 비교적 양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청주지역 구석기 유적이 40여 곳에 이르는 것과 관련해 일부 학자는 청주 일대의 미호강 유역이 구석기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최근 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우 원장은 "청주 일대에서 확인된 고고학적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일대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였고 동물들의 낙원이었으며 인류생명문화의 기원지였음을 말해 준다"고 말했다.

미호강의 역사적 뿌리를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린 청주 만수리유적의 미호강 사람들은 가까운 미호강 변에서 석영질의 강자갈(차돌)을 주워다 찍개, 주먹대패 같은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벼 재배문화의 싹을 틔운 청주 소로리 구석기인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던 주변에서 주로 한 면 또는 두 면이 편평한 돌감을 주워다 밀개, 긁개, 홈날, 찍개 등의 연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소로리 구석기인들은 홈날로 벼 이삭을 잘라 수확했음이 밝혀져 1만7천년 전에 이미 청주지역 미호강 변에서는 벼 재배문화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미호강의 첫 농사꾼은 청주 쌍청리 신석기인

청주시 청원구 사천동 재너머들 한데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그물추(청주박물관 전시). 약 1만년 전인 신석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김성식
청주시 청원구 사천동 재너머들 한데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그물추(청주박물관 전시). 약 1만년 전인 신석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김성식

구석기시대에 이은 신석기시대에도 여전히 청주 인근 미호강 일대는 선사인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다. 신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구석기시대의 이동 생활을 끝내고 정착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청주 인근 미호강 유역에서 신석기인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흔적은 1993년 청주 쌍청리유적에서 처음 찾아졌다. 우종윤 원장에 따르면 이들 신석기인은 '철자(凸)형'의 독특한 구조를 한 움집을 짓고 살았으며 돌보습과 갈판, 갈돌, 돌도끼, 화살촉, 그물추 같은 돌연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또 여러 문양이 새겨진 토기를 구워 생활했다. 시기는 대략 BC 4500년쯤으로, 이들 돌연모와 토기로 보아 미호강에 뿌리 내렸던 청주 쌍청리 신석기 사람들은 농사짓고 사냥과 물고기잡이를 하며 생활했음을 보여준다. 우 원장은 "이런 점에서 이들은 청주 인근 미호강에 살았던 첫 농사꾼들이었던 셈"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청동기시대 들어 농사 보편화 등 생활상 큰 변화

청동기시대에는 미호강 변에서 농사짓기가 더욱 보편화됐다. 삶의 양식에도 변화가 일어 취락이 확대되고 움집 규모와 구조에 있어서도 변화가 왔으며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생활상이 크게 변했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 원장은 "이 시기의 움집은 평면 장방형에 돌돌림 불땐자리, 초석, 저장구덩을 갖춘 구조와 이중단사선문을 특징으로 하는 토기가 출토되는 가락동 유형의 움집으로 대표된다"며 "특히 이 같은 움집은 청주 내곡동, 송절동, 용암동, 비하동, 가경동, 대율리, 풍정리, 장대리, 상신리 같은 미호강 언저리에 집중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했다. 미호강이 여전히 당시 사람들의 주된 삶의 터전 역할을 했음을 뒷받침한다.

돌연모는 돌도끼, 돌대패 같은 나무가공용이 늘어나고 반달돌칼, 돌낫, 돌칼 같은 식물자원의 수확이나 채취를 할 때 사용하는 석기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움집(BC 12~11세기)에서는 간돌검, 화살촉, 반달돌칼과 함께 주로 무덤에서 나오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돼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이 비파형 동검은 남한지역의 초기 동검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찍이 금속문화를 습득한 청동기인들이 청주 인근 미호강 언저리에 살았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단서다.

우 원장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 중 청주 궁평리유적의 취락에 주목했다. 우 원장은 "청주 궁평리 취락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의 압흔(壓痕)을 조사한 결과 논작물인 벼와 밭작물인 기장, 조, 들깨와 함께 곤충이 확인됐다"며 "이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논농사와 밭농사로 작물을 재배해 식량 자원화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시대에 따른 생활·주거지 및 취락 입지 변화

청동기 후기로 갈수록 농사짓기 유리한 입지 선택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향교평들유적의 청동기시대 주거지(8호).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이 주거지에서는 방추차, 그물추, 석검, 석촉, 석도 등이 출토됐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향교평들유적의 청동기시대 주거지(8호).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이 주거지에서는 방추차, 그물추, 석검, 석촉, 석도 등이 출토됐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미호강 언저리에 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를 골라 생활했거나 주거지 및 취락의 입지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수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들짐승 등으로부터 위험 부담이 적은 장소 등이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호강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입지를 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호강의 첫 사람들로 여겨지는 청주 만수리 구석기인이나 세계 최고 볍씨의 주인공인 청주 소로리 구석기인이 1~2km 이내에 미호강을 두고 생활했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미호강을 찾았던 또 다른 구석기인들도 대부분 하천을 중요 생활권에 두고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호강 수계 내 청주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은 어떠했을까. 우종윤 원장은 "움집 입지와 규모로 보면 청주에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야트막한 능선 정상부 또는 비탈사면에 원형이나 장방형의 움집을 1~4동씩 짓고 소규모의 고립된 취락을 이루며 생활했다"며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봉명동·송절동·사천동·가락리·영하리유적 등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취락이 조망 좋은 능선 정상부에 1~3기씩 독립된 형태로 존재한다"며 "특히 청주 대율리유적에서는 환호(環濠) 취락이 조사됐다. 낮은 구릉에 조성한 취락으로 9동의 움집이 3중의 환호 안에 대형, 소형 움집이 공간을 분리하여 계획적으로 조성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환호마을로 주목된다"고 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은 구릉이나 평탄대지 또는 충적대지에 자리하는데 공통적으로 농사짓기에 유리한 입지를 택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봉명동·비하동·서촌동·송절동·운동동·쌍청리·만수리·궁평리·장대리유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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