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리유적 땅속서 뗀석기 출토… 자갈돌 주워 돌연모 제작

미호강 변에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부류였을까. 미호강 변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을까. 시대를 어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미호강의 첫 사람들' 흔적과 마주할 수 있을까. 미호강의 첫 사람들은 어떤 돌연모를 어떻게 만들어 사용했을까.

이 물음들은 '미호강의 역사적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라는 물음과 맥을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호강의 역사적 뿌리는 약 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0만년 전이라고 하면 중국 베이징 원인과 같은 '곧선사람(Homo erectus)'이 살던 시기다.

미호강의 역사적 뿌리의 시작점을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린 유적은 미호강 변의 청주 만수리 구석기유적이다. 만수리유적이 발굴되기까지의 과정과 조사 결과, 의미 등을 살펴봤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저수지 서쪽에서 바라본 현재의 '청주 만수리유적지' 전경. 사진에서 바라다보이는 전 지역이 발굴조사 지역에 해당한다./김성식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저수지 서쪽에서 바라본 현재의 '청주 만수리유적지' 전경. 사진에서 바라다보이는 전 지역이 발굴조사 지역에 해당한다./김성식

 

청주 만수리유적 발굴조사 과정

청주 만수리 유적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발굴 당시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 쌍청리, 연제리 일원의 오송생명과학단지 조성부지 안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1990년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이후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팀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당시 청원군 궁평리 청동기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0여 차례의 답사를 통해 이 지역에 폭넓게 발달한 구석기시대의 고토양층과 석기출토지점을 확인해 보고한 바 있다.

이어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1998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지표조사를 실시해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17개의 유적을 확인했으며 이후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중앙문화재연구원이 2개 지구로 나눠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공식적인 발굴조사는 오송생명과학단지 부지조성을 앞두고 2005년 1월부터 시작해 2007년 10월까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중앙문화재연구원,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등 4개 기관이 참여해 14개 지점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2005~7년 발굴조사 당시 항공 촬영한 청주 만수리유적 전경. 왼쪽 상단의 저수지가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저수지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05~7년 발굴조사 당시 항공 촬영한 청주 만수리유적 전경. 왼쪽 상단의 저수지가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저수지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넓은 한데유적'

조사 결과 14개 지점별로 1~5개의 문화층이 확인된 가운데 모두 9302점(국가귀속유물 기준)의 석기 등 유물이 찾아졌다. 특히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목포대학교연구팀, 프랑스 유럽선사문화연구소, 일본연구팀 등 3국의 연구기관이 참여해 다양한 연대측정 방법으로 만수리유적이 약 50만년 전의 유적임을 밝혀냈다.

이는 곧 만수리유적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넓은 한데유적임을 밝혀낸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 한데유적은 강가나 들판에 위치한 유적으로 동굴유적, 바위그늘유적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로써 만수리유적은 소로리·봉명동·장관리·송두리유적 등 미호강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구석기 유적들의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시금석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아울러 중부지역의 전기~중기에 이르는 석기 제작 연구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만수리유적에서는 또 기반암 층위에서 안정된 퇴적층위가 확인되고 그 안에서 다량의 석기가 출토됨으로써 각 층위에서 발달된 문화성격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기본자료를 제공하게 됐다. 더욱이 땅속 5m 깊이에서 돌을 깨트려 만든 뗀석기들이 출토돼 미호강 첫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으로 기록됐다.

만수리유적 발굴 당시 14개 발굴 조사지점 중 7개 지점에서 8116점(87.3%)을 찾아내는 등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의 이융조 박사(충북대학교 명예교수)는 "만수리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구석기 시대의 석기 제작과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당시 만수리 구석기인들이 석기를 만들 돌감으로 미호강 변에 있던 석영질 계통의 자갈돌을 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자갈돌 석기문화의 전통과 발달과정을 잘 보여준다"며 "분명한 층위 구분 속에서 돌감의 종류, 획득양식, 석기 제작 수법과 발달과정을 고루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만수리유적에서 얻은 큰 성과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 정용승 박사(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는 만수리유적과 관련해 "먼 옛날 한반도 중부지역을 찾았던 구석기인들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청주 만수리 지역에 머물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은 미호강이라는 자연적인 벽 때문일 것"이라며 "이웃한 청주 소로리유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북쪽으로부터 이동해 온 구석기인들이 미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머물면서 독특한 문화층이라는 생활 흔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만수리유적

출토유물들, 발굴기관이 각기 분산 보관 '커다란 과제'

50만년 전 미호강 변의 청주 만수리 구석기인들이 만들어 사용했던 돌연모들. 미호강과 청주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중국 베이징 원인과 동시대로 끌어올린 소중한 유물들이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50만년 전 미호강 변의 청주 만수리 구석기인들이 만들어 사용했던 돌연모들. 미호강과 청주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중국 베이징 원인과 동시대로 끌어올린 소중한 유물들이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12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일본 교토 동지사대학에서는 '동북아시아의 고환경 변화와 구석기 편년'을 주제로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했던 이융조 박사는 "당시 회의에서는 한국·일본·프랑스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 청주 만수리유적에 대한 연구성과를 발표했는데 특히 과학적 연대측정방법으로 얻어낸 1문화층의 연대를 50만년 전으로 발표해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했다.

이어 "50만년 전이라는 연대치는 한국·일본·프랑스 3국 학자들의 공동연구에 따른 2가지의 연대측정방법(Be-10과 MIS 방법)으로 서로 검증해 밝혀진 절대연대"라며 "이 50만년 전의 연대치는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가장 오래된 과학적 연대측정치"라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만수리 유적의 1문화층에서 출토된 50만년 전의 유물은 중국 베이징원인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곧선사람'들의 한 부류가 남긴 삶의 흔적"이라며 "그중에는 당시 사람들이 만수리유적에서 가까운 미호강의 석영질 계통의 돌(차돌)을 골라 돌망치로 직접 떼기를 해서 만든 긁개와 찍개 등의 유물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하지만 만수리유적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이 현재 여러 연구기관(발굴 수행기관)의 수장고에 분산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이런 유물들이 미호강을 포함한 중원문화의 바탕을 열어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볼 때 훌륭한 문화유산을 관계기관들이 협력해 특별전이라도 개최함으로써 국내외의 관심 있는 학자들을 비롯해 충북도민들에게 중원문화의 중요한 요체를 살펴보고 문화적 자긍심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이 박사는 또 지난 2018년 10월 17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안휘성 번창에서 열린 '중국 인자동 유적 발견 2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한국 최고 청주 만수리 구석기유적 연대측정과 의미'를 발표하는 등 여러 차례의 국제학술대회 및 회의에 참석해 만수리유적의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려 깊은 관심과 함께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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