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섭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외교통상부장관시절의 반기문 전 총장 2005.08.31 / 뉴시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막판까지 외교관 다운 면모를 보였다. 지난 1일 그는 '사퇴 소견문'을 품에 지닌 채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차례로 만났다. 전날 밤 가족과 불출마 가닥을 잡았다는 그는 새벽에 일어나 발표문을 작성했다. 마지막 일정이었던 심상정 대표 면담은 이날 오후 3시 였다. 대변인조차 내용을 몰랐다는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은 오후 3시 30분. 의구심을 자아낸 행보를 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미 잡은 일정은 깨지 않는 게 외교관례라 한다.

덕분에 그는 듣지 않아도 될 싫은 소리를 감당해야 했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나이들면 집에 있는 게 최고다. 괜스레 나다니다 낙상하면 아주 힘들어 진다"고 했다. 1945년생(만 73세) 인 위원장은 한 살 많은 반 전총장을 그렇게 비아냥 댔다. 목사 출신인 그 역시 반 전 총장 표현대로라면 '분열되고, 지탄을 받는 새누리당'에서 '정치실험'을 하고 있는 판국 인 데, 말이다.

정작 반 전총장이 부아가 난 것은 다른 이유였다고 한다. "보수에 속하냐. 진보에 속하냐?" 악수도 하기 전에 내던진 인 위원장의 질문에 반 전 총장은 1일 "환멸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사람을 어떻게 진보와 보수로 나누냐"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기를 보였다고 한다. 평생 외교관 외길을 걸었던 그가 진보 또는 보수 한쪼글 자처했더라도 그것은 가식에 불과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가 "영입은 없다. 뜻이 맞다 판단하시면 들어 오면 된다"며 거리감을 둬 꽤나 괘씸했을 게다. 불과 몇달 전만해도 반기문 향해 목을 길 게 빼놓은 모습을 보였던 게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이니 말이다.

외교관은 직업상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대게는 협상 당사자들이 결정한 내용을 잘 전달해 양측 모두에게 긍정적 결론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 게다. 반 전 총장은 아마도 닳고 닳은 노회한 정치인들이 국면 타개용으로 제안했을 수 있는 '대권 제안'을 국가

한인섭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간에 오갈 법한 외교 행위처럼 잘 정제된 것으로 받아 들여 '패착'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박근혜의 포장된 이미지를 활용해 '대통령'이라는 우산을 썼던 새누리당 친박은 차기를 도모할 수 있을 듯한 '징검다리'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지난 20일간 그가 경험한 것은 외교가 아니라 현실정치 였다. 그의 표현대로 정치는 구태의연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었다. 이 와중에 그가 잘한 것은 외교관 답지 않은 과감한 결정이다. 손가락을 작두로 자르려면 손을 쳐다보지 않아야 한다는 데, 반 전총장은 그걸 해 냈다. 경륜이라면 경륜이고, 감각이라면 감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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